141st prescription_가난한 자의 연애

X님 :

(아래는 전문입니다.)

생활고가 계속되니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어지기도 하지만 때로는 이것조차도 사치인 것 같습니다. 이 한몸 챙기기도 힘든데 남들하고 엮인다는 것 자체가 부담이 되요. 여친이 당장 생길 것 같지도 않지만 생긴다고 해도 어찌해야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X님, 엘입니다. 

가난은 반복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인간은 환경의 영향에서 완벽히 자유롭기 힘들죠. 가난하지 않은 집안에서 나고 자라면, 살아가면서도 가난을 잘 모르게 될 확률이 큽니다. 반대로 가난한 집안에서 나고 자라면, 살아가면서도 가난하지 않게 사는 방법을 잘 모르게 될 확률이 커요. 

하지만, 내가 어떤 경제적 상황에 있어도, 삶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들은 (다행히도) 나의 바깥이 아닌 안에 있죠. 옆집 중학생도, 아줌마도 아저씨도 마음 속에 있는 마법의 성은 똑같이 아름다울 수 있어요. 길거리의 노숙인 할아버지도 지하철 앞 노점상 할머니도 꿈은 우주만큼 클 수 있죠. 누구라도 사람이 필요하고 사랑이 필요하죠. 당장 끼니를 떼우고 안전이 확보되면, 그 다음에는 사람을 관계를 원하죠. 하물며 건강한 이십대인데, 사랑하지 않고 어떻게 견디겠어요. 

생각해보죠. 사랑하려면 사랑할 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사랑할 사람을 만날 인간관계를 감당할 수 없는 가난이라면 어떡하죠. 가난 때문에 인간관계가 끊어질 수 있을까요.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우선, 가난 때문에 인간관계가 끊어진다면.

사회적 관계는 비용이거든요. 여기서 비용이란 단순히 돈 문제만 말하는 건 아니에요. 체력도 필요하고, 시간도 필요하고, 관심과 신경을 쏟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도 필요합니다. 생존을 고민해야 하는 가난은, 생활을 가꿀 수 없게 만듭니다. 당장의 생존에 급급한 가난이라면 새로운 인간관계는커녕 기존의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버거워집니다. 

반면, 가난으로 인간관계가 영향받지 않는다면. 

불행 중 다행으로 '가난'이 상대적인 개념이기 때문이에요. 한달 생활비가 300만원인 사람이 있고, 하루 용돈이 300만원인 사람도 있죠. 연봉 3억 친구 옆에서는 연봉 3천이 초라해보이고, 무급 3개월 인턴에게는 연봉 3천의 김대리가 부러울 수 있죠. 

생존은 지붕 아래에서 살고, 전기, 수도, 도시가스 안 끊어지고, 쌀밥 먹을 수 있으면 가능해 집니다. 7천원 짜리 재활용 에코백을 들어도 아무렇지 않은 사람도 있고, 3천만원 짜리 에르메스 백을 들어도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는 사람도 있어요. 내가 가난하다 가난하지 않다 그걸 누가 정하나요.   

계층은 존재하지만, 가난은 타인이 평가하거나 관여할 수 없는 프라이빗한 조건일 뿐입니다. 사람마다 겪고 있는 박탈감과 열등의식, 소외감과 내적 허기는 천차만별입니다. 그걸 남이 이렇다 저렇다 입에 올릴 권리가 있나요. 내가 타인의 가난을 평가하는 천박함을 갖추었다 증명하는 어리석음을 굳이 행할 이유가 있나요. 

X님. 

내가 가난해도,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수많은 인간들 안에서 살게 됩니다. 타인의 프라이버시를 함부로 평가하거나 관여하지 않는 성숙한 인격을 가진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요. 나를 평가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세요. 이성이라면,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여성을 만나도 좋아요. 물론, 나의 가난은 일시적이고, 내가 곧 경제활동을 시작하기 전의 한시적인 상황이라고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괜찮아요. 가난한 연인 모드도, 불행하게 생각하지만 않으면 꽤 즐겁거든요. 머리를 많이 써야 해서 스릴 넘치기도 하고요. 만약 내가 가난하다고 해서 나를 만나기 꺼려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X님에게도 가치없는 사람일 가능성이 커요. 연애도 데이트도 여러가지 방법이 있고, 부자라면 부자다운 소비 방법이, 가난하다면 가난한 대로의 소비 방법이 있어요. 그저 그대로를 즐기면 돼요. 정말로 사랑하면, 내가 가난하다고 해서 나를 버리지 않아요. 내가 가난하다고 해서 내가 주눅들지 않아요.

물론 가난은 가끔 불편하죠. 괜찮은 레스토랑에서 근사한 요리가 먹고 싶을 때, 가까운 지인이 비싼 명품을 선물받았을 때, 경제적인 것에 구애받지 않고 집안의 도움으로 지인이 결혼할 때, 양육비 걱정 없이 둘째 낳고, 셋째 낳을 때, 유학가고 싶은데 돈 걱정없이 유학 갈 때, 혼자도 힘든 유럽 여행을 온가족이 함께 갈 때. 부러울 수 있죠.  

하지만. SNS나 카톡 프사나 매체나 칼럼이나 드라마에 휘둘리지 않으면. 나의 가난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때는 훨씬 많죠. 아껴 모든 쿠폰으로 열번째 커피를 공짜로 마실 때. 이통사 부가서비스로 영화 티켓과 팝콘을 반값으로 해결할 때, 산책은 언제나 무료고, 도서관과 공원은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있죠. 장을 봐서 요리를 만들어먹고, 인터넷 라디오로 음악을 듣고,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신청만 하면 천원으로 갈 수 있는 재즈 콘서트를 가죠. 봄, 여름, 가을, 겨울마다 변하는 산과 하늘은 무료로 감상할 수 있고, 해질녘의 매직아워는 누구에게나 특별한 감동을 줘요.  

승마와 요트는 비싼 취미이지만, 컬러링북이나 독서, 산행, 소셜 댄스를 즐기는 일은 생각보다 말도 안 되게 저렴한 가격으로 즐길 수 있는 취미죠. 조깅이나 명상, 요가, 외국어 공부는 돈을 거의 안 들여도 할 수 있죠. 스마트폰과 노트북과 인터넷은 비싸지만, 정보만 있으면 생각보다 싸고 저렴하게 획득할 수 있는 서비스죠.    

많은 사람들이, 남들의 소비와 나의 소비를 비교하며 고통 받아요. 어떤 물건을 언제 사느냐에 따라서 자신의 아이덴티티가 결정된다고 생각하죠. 매체와 광고에 노출되는 만큼 더 많은 소비를 하지 못해서 안달이고, 아는 만큼 가지지 못해서 불행하다고 생각하죠. 내가 물건 때문에 가난하다 생각한다면,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가 바라는 바예요. 돈이 없는 만큼 자신을 더 불쌍하게 생각하고, 자본의 충실한 노예로 욕망에 시달리고, 시키는 대로 일하고 소비하다 죽을 테니까요. 돈없이도 가질 수 없는 가치들을 폄하하고, 삶을 누리는 자연스런 방법을 망각하고 불행하게 살 테니까요.    

하지만, 상대적으로 가난해도 불행해지지 않을 수도 있어요.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가난이 나를 지배할 수 없어요. 새 물건을 덜 사고, 내가 가진 것들에 애정을 쏟아요. 내 물건과 나의 소비는 나를 규정하지 않아요. 가난이 나에게 인간관계를 해라 말아라 명령하지 않아요. 그러므로, 내가 지금 사랑하지 못할 이유가 없지요. 

X님. 

가난은 당신의 본질이 아니에요. 누군가 여유있는 사람이 나를 도와준다면, 그 만큼의 사랑을 주고 그 도움을 받아요. 내가 더 여유있는 사람이 되어야 내가 편하겠다는 생각이 든다면, 사실 아무 일이라도 하면 되잖아요. 하지만, 우리는 다른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잠시 경제활동을 멈춘 것뿐이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가진 것 없는 스스로를 너무 불쌍하게 생각하지는 말아요. 내가 가난하기 때문에 불편한 자리라면, 그 자리는 잠시 쉬세요. 나만큼 혹은 나보다 더 가난한 사람들을 만나야 할 때라면, 솔직해지고 서로를 도와줄 수 있도록 해요. 내가 가난을 내색 못할 자리라면, 그런 사람들과는 어차피 오래 우정을 쌓을 가치가 없을 지도 몰라요.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해요. 

"네가 가난하다 알면, 사람들은 너의 본질보다 너의 가난을 먼저 본다. 가난한 자들은 사회에서 주목받지 못하고, 쉽게 사회에서 소외되고 핍박당하고 경멸받는 위치에 있어. 사람들은 약한 자를 먼저 해치고 짓밟는 경향이 있지.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런 경향은 개선되지 않아. 그래서 사람들은 가난을 숨겨. 너도 너의 가난을 숨기는 것이 좋을 거야." 

이 사람의 말도 맞아요. 내가 가난하다고 알게 되면, 사람들은 나를 쉽게 동정하거나 정당한 소비가 필요한 자리에 나를 부를 수 없게 되지요. 가난하지 않은 척 위장하고 있다가, 실제로 가난을 벗어나고 난 뒤에 비로소 사람들과 어울리는 방법도 있어요. 

하지만, 내가 가난한데 가난하지 않은 척 한다고 가난을 벗어날 수 있나요. 자신을 가난하다 가난하지 않다로 서술하지 않아도 돼요. 가난해도 내가 타인에게 베풀 수 있는 건 많아요. 내가 가진 것이 눈물이라면,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울어요. 내가 갖고 있는 것이 귀라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요. 내가 갖고 있는 것이 나의 네트워크라면, 다른 사람들이 방황할 때 내가 아는 인맥을 소개시켜줘요. 내가 갖고 있는 것이 입이라면, 기운없는 사람에게 용기내라고 따뜻한 말을 전해요. 돈이 없어도 내가 사람들과 관계맺을 수 있는 방법은 많아요. 

돌아보면 나보다 가난한 사람도 많지요. 그런 사람들이 상처받지 않도록, 나의 소비를 자랑하지 않도록 조심해요. 

맞아요. 내가 가진 것 때문에 인간관계는 제한될 수 있어요. 하지만, 마음을 표현하는 일은 그렇지 않아요. 그러니까, X님도 타인을 지향하는 마음을 누르지 말아요. 사랑도 해요. 누군가를 만나는 것을 미리부터 포기하지 말아요. 그리고, 의지하고 싶다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에게 의지하세요. 대신 그 사람에게 사랑을 주세요. 그러면 되어요.










(* 2015년 3월 4일 리라이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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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스이 2009/02/11 01:22 #

    아... 감동적인 이야기였습니다. 굳이 연애의 문제가 아니더라두요.
    두고두고 읽고 싶어 체크합니다 :>
  • 라엘 2009/02/11 01:34 #

    스이님 블로그 갔다왔어요. ^-^ 항상 깨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 같아요. 좋아보여요.
  • 2009/02/11 02:14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라엘 2009/02/11 12:53 #

    산업사회가 시작되면서, 우리는 너무 많은 재화에 둘러쌓이게 되었지요. 그리고, 물건은 넘치고, 가난한 사람도 더 넘치게 되었어요. 같은 동네에서도 어떤 집에서는 음식과 물건이 썩어넘치고, 어떤 집에서는 당장의 끼니가 없어서 수돗물을 마시지요. 넘치는 쪽은 어디에 어떻게 나누어야 할 지 모르고, 부족한 쪽은 어디에 어떻게 도움을 요청해야 할 지 몰라요. 체제는 바뀌기 힘들고 우리는 영원히 이 불균형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지요. 하지만, 사랑은 그렇지 않지요. 그래서 다행인 것 같아요.

    그리고, 우리에게 쓰고 넘치는 것을 꾸준히 나누려고 노력한다면, 세상은 아주 조금 더 좋아질 거에요. 다 쓰지도 못할 물건들을 더 많이 만들기 위해 환경을 파괴하고 야근에 시달리는 노동자들과 다 쓰지도 못할 돈을 더 많이 부풀리기 위해 고민하고 전전긍긍하는 자본가들은 인류의 아이러니인 것 같아요.

    더 많은 사회 운동과 더 많은 사회 단체들이 생겨나고, 각자의 신념에 따라 그들의 행동에 동참할 수 있게 되면 좋겠어요.
  • 빠다 2009/02/11 12:29 #

    인생에 있어서 가장 올바르게 살아가는 방법인것 같아요. 가진것은 없지만 사랑을
    나누면서 산다면 가장 부자인것 같습니다.
  • 라엘 2009/02/11 12:54 #

    그래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데이트도 해야 하니까, 가진 것이 조금은 있으면 좋겠지요. ^ㅅ^
  • 지누 2009/02/11 20:14 #

    질문에 비해 상당히 긴 답변이네요;;;
    저에게도 정말 가난을 이해할 줄 아는 여성이 나타난다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 OTL
  • 라엘 2009/02/11 21:53 #

    현시창이라 하던가. 줄임말로? -ㅅ-

    저는 전에 가난한 여자가 좋아요, 라는 부자 남자가 있었는데요, 역시 취향이 아니니 가난을 이해받아도 마음은 전혀 즐겁지 않더라구요.
  • 2009/02/11 20:17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라엘 2009/02/11 21:52 #

    질문 내용에 너무 공감하는 탓에. 남일 아니다 싶어 길어졌지 뭡니까. 그나저나 오늘밤은 정말 배가 고프네요. 식욕은 없는데. 어쩌죠. 고양이라도 잡아먹을까. ㅠㅅㅠ
  • 2009/02/13 23:33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라엘 2009/02/16 15:04 #

    분명히 생활은 가난의 지배를 받지요.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에요. 하지만, 많은 것을 가질 수 없는 삶도 나쁘지 않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지요. 사실 지금 내 방을 둘러보면, 나는 아직도 지나치게 많은 물건들에 둘러싸여 있거든요. 충분히 버리고 버렸다고 생각해도,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이상은, 내 주변에는 물건들이 넘쳐요. 나는 사실 그런 많은 물건들이 필요하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말이죠. 내가 소비하는 물건 때문에 내가 달라지면 안되겠지요.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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