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2월 11일
141st prescription
X님 :
(아래는 전문입니다.)
생활고가 계속되니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어지기도 하지만 때로는 이것조차도 사치인 것 같습니다. 이 한몸 챙기기도 힘든데 남들하고 엮인다는 것 자체가 부담이 되요. 여친이 당장 생길 것 같지도 않지만 생긴다고 해도 어찌해야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난은 반복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환경적인 영향도 크지요. 가난하지 않은 집안에서 나고 자라면 살아가면서도 가난을 잘 모르게 될 확률이 크지요. 반대로 가난한 집안에서 나고 자라면 살아가면서도 가난하지 않게 사는 방법을 잘 모르게 될 확률이 커요. 저는 무척 가난한 집안에서 나고 자랐고, 주변에도 중산층은 있어도 부자는 없어요. 저는 가난하지 않게 사는 방법을 잘 몰라요. 그렇지만, 조금 불편하긴 해도 나름대로 적응하고 살고 있죠.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몫돈 들어갈 일이 생기기 때문에, 늘 불안하고 긴장되고 필요할 때 돈이 없다는 것은 조금 문제지만, 당장 죽지는 않으니 다행이죠. 하지만, 내가 어떤 경제적 상황에 있다고 하더라도 내 삶에 있어서의 가장 큰 욕구는 사랑이었던 것 같아요. 사실 누구라도 그럴 걸요. 옆집 중학생도, 아줌마도 아저씨도 사랑이 고파요. 길거리의 노숙자 할아버지도 지하철 앞 노점상 할머니도 사랑이 필요해요. 누구라도 사람이 필요하고 사랑이 필요하죠. 당장 끼니를 떼우고 안전이 확보되면, 그 다음에는 사랑을 해야 해요. 하물며 건강한 이십대인데, 사랑하지 않고 어떻게 견디겠어요.
저는 가난 때문에 인간관계가 똑 끊어진 적이 여러 번 있어요. 고향이 지방인데다 10년 동안 14번도 넘게 이사를 다니다보니 동네 친구도 없고요. 지금도 친구가 적은 편이죠. 그래도 인간관계가 아주 없다면 너무나 쓸쓸할 거에요.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혼자서 외로워하지는 않아도 돼요.
X님은 나의 가난을 이해하고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면 돼요. 이성이라면,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여성을 만나는 것도 좋아요. 물론, 나의 가난은 일시적인 것이어서, 내가 곧 경제활동을 시작하기 전의 한시적인 것이라는 상황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괜찮아요. 가난한 연인 모드도, 불행하게 생각하지만 않으면 꽤 즐겁거든요. 머리를 많이 써야 해서 스릴 넘치기도 하고요. 만약 내가 가난하다고 해서 나를 만나기 꺼려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X님에게도 가치없는 사람일 가능성이 커요. 연애도 데이트도 여러가지 방법이 있고, 부자라면 부자다운 소비 방법이, 가난하다면 가난한 대로의 소비 방법이 있어요. 그저 그대로를 즐기면 돼요. 정말로 사랑하면, 내가 가난하다고 해서 나를 버리지 않아요. 내가 가난하다고 해서 내가 주눅들지 않아요.
저는 나의 가난을 절실하게 느낄 때가 보통 이럴 때인 것 같아요. 괜찮은 레스토랑에 가서 근사한 요리가 먹고 싶을 때, 가까운 지인이 비싼 명품을 선물받았을 때, 경제적인 것에 구애받지 않고 집안의 도움으로 지인이 결혼할 때. 하지만, 나의 가난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때는 보통 이럴 때인 것 같아요. 남자친구와 쿠폰으로 아이스크림과 번 콤보를 공짜로 먹고, 이통사 부가서비스로 영화 티켓과 커피를 공짜로 즐기고, 이것저것 구경하며 홍대 거리를 신나게 돌아다닌 다음, 집에서 밥해먹고, 하루종일 침대 위에서 데굴데굴하며, 얼마전 배운 고스톱으로 설겆이 내기를 할 때. 하루종일 데이트하고 든 비용은 버스비 정도였지만, 전혀 가난하다고 생각되지 않았죠. 친구가 살쪄서 못 입는다고 나에게 준 핑크색 모직 스커트를 세탁소에서 5천원을 주고 미니스커트로 수선했는데, 정말 예쁜 거에요. 아마 백화점에서 샀다면 세일을 해서도 십만원은 족히 넘어갔을 녀석이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전 전혀 가난하다고 생각되지 않았어요. 쌀이 남아돈다는 동생에게 택배로 쌀을 얻었고, 자꾸 새 김치가 생겨서 처치 곤란이라고 해서 김치도 얻어왔죠. 맛있는 김치볶음밥을 만들어 먹었는데 저는 전혀 가난하다고 생각되지 않았어요.
내가 회사를 다니며 안정적인 연봉을 받을 때는, 항상 남들의 소비와 나의 소비를 비교했어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어떤 물건을 언제 사느냐에 따라서 자신의 아이덴티티가 결정된다고 생각하죠. 나 역시 더 많은 소비를 하지 못해서 안달이었고, 내가 가져야할 것들이 부족하기 때문에 내가 불행하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저는 회사를 다니던 옛날보다 비교도 못할 만큼 가난해졌지만, 가장 쓸데없는 것을 하나 버렸기 때문에 이전보다 덜 불행하답니다. 저는 가난과 친해지고 물욕을 버렸어요. 좀처럼 새 물건을 사지 않고, 내가 가진 것들에 애정을 쏟지요. 새 남자보다 나의 오랜 남자친구에게 애정을 쏟고 사랑받아요. 내 물건과 나의 소비는 더이상 나를 대변하지 못하고, 가난은 오히려 놀이처럼 되었어요. 그러니까 지금 내가 사랑하지 못할 이유가 없지요.
X님, 가난이 자신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세요. 누군가 여유있는 사람이 나를 도와준다면, 그 만큼의 사랑을 주고 그 도움을 받아요. 내가 더 여유있는 사람이 되어야 내가 편하겠다는 생각이 든다면, 사실 아무 일이라도 하면 되잖아요. 하지만, 우리는 다른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잠시 경제활동을 멈춘 것일 뿐이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스스로를 너무 불쌍하게 생각하지는 말아요. 내가 가난하기 때문에 불편한 자리라면, 그 자리에 나가는 것은 잠시 쉬세요. 나만큼 혹은 나보다 더 가난한 사람들을 만나야 할 때라면, 서로 솔직해지고 서로를 도와줄 수 있도록 해요. 내가 가난하다는 것을 내색 못할 자리라면, 그런 사람들과는 어차피 오래 우정을 쌓을 가치가 없을 지도 몰라요.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해요. "네가 가난하다는 것을 알면, 사람들은 너의 본질보다 너의 가난을 먼저 본다. 가난한 자들은 사회에서 주목받지 못하고, 쉽게 사회에서 소외되고 핍박당하고 경멸받는 위치에 있어. 사람들은 약한 자를 먼저 해치고 짓밟는 경향이 있지.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런 경향은 개선되지 않아. 그래서 사람들은 가난을 숨겨. 너도 너의 가난을 숨기는 것이 좋을 거야." 이 사람의 말도 맞아요. 내가 가난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사람들은 나를 쉽게 동정하거나 정당한 소비가 필요한 자리에 나를 부를 수 없게 되지요. 가난하지 않은 척 위장하고 있다가, 실제로 가난을 벗어나고 난 뒤에 비로소 사람들과 어울리는 방법도 있어요. 하지만, 내가 가난한 것이 가난하지 않은 척 한다고 가난을 벗어날 수 있는 건 아니지요. 그래서 저는 그저 가난하다고 말해요. 그리고, 가난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지요. 가난하지만 내가 베풀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지요. 내가 가진 것이 눈물이라면,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울어요. 내가 갖고 있는 것이 귀라면, 다른 사람의 하소연을 들어요. 내가 갖고 있는 것이 나의 네트워크라면, 다른 사람들이 방황할 때 내가 아는 인맥을 소개시켜줘요. 내가 갖고 있는 것이 입이라면, 기운없는 사람에게 용기내라고 따뜻한 말을 전해요. 돈이 없어도 내가 사람들과 관계맺을 수 있는 방법은 많아요. 그리고, 돌아보면 나보다 가난한 사람도 많지요. 그런 사람들이 상처받지 않도록, 나의 소비를 자랑하지 않도록 조심해요.
맞아요. 내가 가진 것 때문에 인간관계는 제한될 수 있어요. 하지만, 사랑은 그렇지 않아요. 그러니까, X님도 사랑을 하시기 바래요. 누군가를 만나는 것을 미리부터 막아놓지는 말아요. 그리고, 의지하고 싶다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에게 의지하세요. 대신 그 사람에게 사랑을 주세요. 그러면 되어요.
# by | 2009/02/11 01:03 | LOVE&MEMORY(101st~) | 트랙백 | 덧글(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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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고두고 읽고 싶어 체크합니다 :>
그리고, 우리에게 쓰고 넘치는 것을 꾸준히 나누려고 노력한다면, 세상은 아주 조금 더 좋아질 거에요. 다 쓰지도 못할 물건들을 더 많이 만들기 위해 환경을 파괴하고 야근에 시달리는 노동자들과 다 쓰지도 못할 돈을 더 많이 부풀리기 위해 고민하고 전전긍긍하는 자본가들은 인류의 아이러니인 것 같아요.
더 많은 사회 운동과 더 많은 사회 단체들이 생겨나고, 각자의 신념에 따라 그들의 행동에 동참할 수 있게 되면 좋겠어요.
나누면서 산다면 가장 부자인것 같습니다.
저에게도 정말 가난을 이해할 줄 아는 여성이 나타난다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 OTL
저는 전에 가난한 여자가 좋아요, 라는 부자 남자가 있었는데요, 역시 취향이 아니니 가난을 이해받아도 마음은 전혀 즐겁지 않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