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rd prescription_제대하고 보니 제가 소년가장이 되어 있더군요

H님 :

(아래는 요약내용입니다.)

제가 스무살까지만 해도 저의 집은 화목했어요. 그런데, 제대하고 보니,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있더군요. 지금은 빚더미에다가 넋놓으신 어머님와 저만 남았습니다. 집세과 세금, 공과금이 밀린 상태라 저는 알바를 전전하며 미친 듯이 일해서 빚을 갚기 시작했어요. 어머님은 경제능력이 없으십니다. 

정말 인생 허탈합니다. 아버지는 연락조차 되지 않습니다. 제 꿈은 게임 그래픽 디자이너인데, 대학도 못갈 형편이 되어 아는 분께 돈을 빌려 겨우겨우 방통대를 들어갔습니다. 제 한달 월급은 보잘 것 없습니다. 어떻게 버틸 지 막막합니다. 세상은 저에게 죽으라고 죽으라고만 하네요. 
  
저는 꿈을 접고 집을 바로 세우는 게 옳을가요? 아니면, 집 사정보다는 제 꿈을 향해서 달려가는 게 맞을까요? 도와주세요. 






H님, 닥터 엘입니다.

어쨌거나 H님은 살아남으셨습니다. 아직도 삶은 계속됩니다. 고통도 계속 되지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행복해지기 위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죠.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고통스런 삶에서 나를 분리하여 들여다볼 수 있게 됩니다. 빚이 몇억이 되어도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도 많죠. 고작 몇백만원의 빚 때문에 자살했다고 하면, 사람들은 너무나 안타까워하겠죠. 저 역시 학자금 대출이 2천 가까이 되는 상황이라, 별 거 아니야 라고 토닥토닥 해드리고 싶군요.

자, H님이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입 밖으로 소리내서 "별 거 아니야."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도 그렇게 말하고, 어머님에게도 그렇게 말하고 동생에게도 그렇게 일러두세요. 많은 사람들이 H님을 절망에 빠뜨리려고 안간힘을 쓸 것입니다. 아마도 가장 가까이 있는 가족이 더 그렇겠죠. 처지를 비관하고 H님의 어깨를 짓누르고 부정적인 얘기만 하겠죠. 하지만 지지 마세요. 절대로 타인이 재단하는 시선대로 되지 마세요. 스스로를 불쌍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들에게 반복해서 희망을 얘기하세요. 어머님에게 결혼 실패가 인생의 끝이라고는 얘기하지 마세요. 그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고 앞으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라고 하세요. 다시 도전하고 다시 시작하라고 하세요. 동생에게도 걱정 말라고 하세요. 둘이 힘 합치면, 살아남는 것쯤은 문제 없다고 장담하세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자고 해보세요. 스스로에게도 반복해서 되뇌이세요. 불행 따위에 질 수 없다고 말이에요. 말에는 힘이 있답니다. 늘 평소에 말하던 대로,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찾아갈 것입니다.

H님이 두번째로 할 일을 알려드릴게요. 그것은 부모님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버리는 것입니다. 그들을 원망하지 마세요. 부모님의 결혼 실패로 인해, H님의 인생이 불행해지도록 두지 마세요. 어머님이 당장 큰 수술을 앞두거나 지병이 있어서 병원비를 내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하세요. 어떤 부모는 자녀를 끝까지 보살피지만, 어떤 부모는 부모의 역할은 커녕 자신들의 결혼 생활 조차도 제대로 감내하지 못합니다. 부성애나 모성애, 부모의 도리나 책임은, 사회적인 것인 학습기제이고 후천적으로 형성되는 책임감이며, 많은 부모들이 이것들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H님이 운이 조금 좋지 않았을 뿐이에요. 앞으로의 H님이 만들어가야할 인생은 온전히 H님의 손으로 만들어지는 것이죠. 온전하게 내 삶이 내 앞으로 다가온 것에 감사해야 할 지도 몰라요. 물론, 지금은 이것은 내 것이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고 도망가고 싶을 거에요. 하지만, 내 삶을 내가 껴안지 않으면, 어디서도 나는 살아갈 수 없어요. H님이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미래는 달라질 거에요. 깊이 생각하고, 많이 질문하고, 답을 찾으세요. 가족에 대한 원망을 버리는 것만으로도, H님은 자신의 발목을 잡아당기는 커다란 짐 하나는 놓게 될 거에요. 그렇다고 그들을 무조건 용서하고 껴안으라는 것은 아닙니다. 나이가 든 사람들은 쉽게 바뀌지 않아요. 불행과 행복 중에서 불행만을 선택하고 불행에 지배당해서 살아가기를 벗어나려 하지 않을 수도 있죠. 그저 그들이 더 이상 다치지 않게만 하세요. 늘 격려해주세요.

H님이 세번째로 할 일을 알려드릴게요. 돈을 관리하세요. 가계부를 직접 쓰세요. 모든 지출과 수입을 세세하게 기록해요. 모든 통장의 입출금을 확인하세요. 보험 약관을 확인해보세요. 동산 부동산 다 확인해보세요. 만약, 어머니가 그것을 거부한다면, 가계와 자신의 수입과 지출을 철저하게 분리하세요. 세금이 언제 어떻게 나가는지, 통장의 이자율은 어떻게 되는지. 각종 정보를 모으고 공부를 하세요. 인터넷 커뮤니티에 가입해서 정보를 모아요. 은행 빚이 없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세요. 보통 밑바닥부터 올라온 부자들은 돈을 버는 것보다 돈을 쓰는 일에 훨씬 신경을 씁니다. 그리고, 지출을 해야할 때, 지출을 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최후의 순간까지 고민하세요. 얻을 수 있는 것은 얻고, 무료로 취할 수 있는 서비스는 무료로 이용하세요. 팔 수 있는 것은 팔아요. 교환할 수 있다면 교환을 하세요. 돌아보면, 사람들은 너무 많은 물건들에 둘러싸여 있는데도, 단지 불안하기 때문에, 자신이 뒤쳐지는 것 같아서 소비를 한답니다.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물건에 애정을 쏟아요. 그러면, 물욕에서 점차 벗어날 수 있어요. 돈이 허투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세요.

H님이 네번째로 할 일을 알려드릴게요. 공부를 하세요.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곳이나 정부 지원 교육 센터 같은 곳을 알아보아요. 정보를 모아요. 잘 모르면 누군가에게 물어보아요. 그 누군가가 모르면 바운더리를 바꿔서 또 누군가에게 물어보아요. 절실하게 절박하게 주변에 도움을 청해요. 들어가고 싶은 회사나 학원에도 물어보고, 친하지는 않지만 선배나 선생님에게도 물어보고 도움을 구해요. 길은 반드시 있어요. 그 길을 찾아요. 수없이 경로 수정을 하세요.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말아요.

H님, 어머니와 동생을 부양해야 하는 일에 얽매이지 마세요. 모두 성인이잖아요. 의지를 잃지 않도록 하고, 현실적인 계획을 세워요. 갚아야 하는 돈을 등분하고, 언제까지 어떻게 갚을 지 생각해요. 학비가 얼마나 필요하고 무슨 일을 해서 모을 지 생각해요. 시간이 걸리는만큼 진학이 늦어지는 것을 걱정하지 마세요. 기회가 오는대로 원하는 것을 향해서 조금씩 움직이세요. 중요한 것은 멈추지 않는 거에요. 남들보다 느릴 수는 있죠. 하지만, 미리 절망하고 멈추어서면, 더이상 내 삶을 호흡할 수 없을 거에요. 분명히 좌절도 많을 테고, 시행착오도 있을 거고, 실패도 할 거에요. 하지만, H님은 할 수 있어요. 생존에 골몰해야 하는데, 감상에 젖어있을 여유는 없는 거랍니다. H님이 죽고 사는 문제는 운명이 아니라 선택이에요. 살아남으세요.  











덧글

  • 달바다 2009/03/31 07:03 #

    방통대라면 장학금 혜택이 꽤 있을 꺼예요.잘 알아보시면 좋겠네요.
    아무튼 h님 사세요!살아요.살아서 웃을 날을 위해 살아요!
  • 2009/03/31 12:01 #

    방통대 장학금이 타 대학보다 관대한 편이죠. ^ㅅ^
  • 校獸님ㄳ 2009/03/31 07:51 #

    힘이 되는 말씀이네요. 당사자가 아닌데도 별 거 아니야 부분에 찡했어요.
    마음대로 안 되는 일에 부딪힌 사람들 모두 힘내고 잘 살았으면.
  • 2009/03/31 12:02 #

    지금 시국도 엉망이라, 가정이 불안불안하면 어디에 기대야 하나 막막하죠. 그래도, 믿은 사람은 자기 자신 뿐 아니겠습니까. 불끈.
  • 2009/03/31 09:28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09/03/31 12:03 #

    사실 지금 저에게도 필요한 처방전이랍니다. 저 역시 힘든 시기를 건너가고 있거든요. ^^
  • 플로렌스 2009/03/31 09:43 #

    저도 학창시절 집이 풍비박산 났었습니다. 그 덕분에 유학 등의 꿈은 접어버렸지요. 하지만 일단은 살아남는 것이 중요한 듯 싶습니다. 살다보면 언젠가 다시 살만해질 시기가 오니까요.
  • 2009/03/31 12:03 #

    영화나 드라마처럼 갑자기 확 피진 않아도, 아주 더디게 나아지더라구요. ^^
  • 발라 2009/03/31 10:00 #

    강한 사람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생존한 사람이 강한 것입니다.
    '최악이다.' 라고 말할 수 있을 때는 아직 최악이 아닌게지요.
  • 2009/03/31 12:02 #

    흠흠. 맞는 말씀입니다.
  • 팡야러브 2009/03/31 11:03 #

    호오~ 연애상담소인데 이런 내용들도 상담을 받으시는군요~
    군대갔다와서 풍비백산이 났다면.. 마음고생이 심하시겠다는...;;
    부디 힘내시기 바랍니다!
  • 2009/03/31 12:04 #

    부모가 되었다고 해서 어른 되는 것도 아니죠. 사실 별 관계없더라구요.
  • 맑음뒤흐림 2009/03/31 12:03 #

    H님뿐만 아니라 어머니도, 동생도 함께 노력해야겠지요. 홧팅입니다!!
  • 2009/03/31 12:05 #

    남동생이니, 싸나이 둘이 힘을 합치면 못할 일이 어딨겠어요. 으랏차!
  • 예랑 2009/03/31 12:16 #

    저런 상황인데도 H님께서는 벌써 일어나셨잖아요. 그 것만 해도 이미 시작이구, 시작이 반이라니 이제 남은 반만 잘 해나가시면 되지 않을까요 :) 힘 내셨으면 좋겠어요, 정말로.
  • 2009/03/31 12:37 #

    맞아요. 지금도 잘 하고 계시니까요!
  • Genesis 2009/03/31 18:03 #

    힘내세요.
  • 2009/03/31 22:45 #

    기를 보냅시다! 얍얍!
  • 2009/03/31 22:23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09/03/31 22:47 #

    살아남으셔서 다행입니다. ^-^ 언젠가 행복한 날이 올 거에요. 저 역시 무책임한 부모에 대한 예라면 몇개라도 들 수 있는 처지랍니다... ㅠㅅㅠ 다른 부모와 비교하면 인생 솟아날 구멍이 안보이죠. 그저 빨리 포기하고, 할 수 있는 한 불행에서 멀리 달아나는 수 밖에요. ^^
  • 제나 2009/04/01 02:59 #

    우선은 엘님의 말씀대로. "괜찮다. 별 거 아니다. 할 수 있다."라고 강한 의지를 갖고 말해보세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정말 그런 것처럼 말해보세요. 사람은 의외로 말에 잘 휘둘린답니다.
    남자는 특히 군대를 다녀오면 제대 전보다 더욱 "군대도 다녀왔으니 철 들어야지." 라는 대표적인 책임감에 시달리는 것 같아요. 게다가 장남이죠. 그래서 더욱 책임감에 시달려 더더욱! 힘겹게 느껴지실 거에요. 하지만 H님 자세한 나이는 알 수 없지만 아직 20대잖아요. 먼 인생을 놓고 본다면 젊다 못해 어리기까지 해요! 괜찮아요, 할 수 있어요. 문자 그대로 군대도 이겨내셨잖아요. 뭔들 못하겠어요?
    우리는 엄마 뱃속에서 태어났죠. 말 그대로 어머니의 뼈와 살과 피에서 추출 된 거에요. 하지만, (어머니와 한 몸이었지만) 지금은 타인이죠. 어머니를 가족이 아닌 한 사람의 객관화 된 사람으로 보세요. 기대치를 버리세요. 어머니도 H님도 각각의 성인이죠. 동등한 인격체로 바라보시고 한 공동체의 주민이라고 생각하세요. 주의할 점은 나 외의 구성원을 낮춰보면 안된다는 거에요. 그러면 서로에게 반드시 상처주는 말이나 행동을 해버리고 마니까요. 저는 사실 이 부분이 가장 오래 걸렸어요. 하지만 효과는 정말 좋답니다. 제가 보증해요!

    엘님, H님은 타인에게 도와달라고 손을 내미는 용기를 가지신것부터가 대단하신 것 같아요. 그리고 희망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증거 같구요! 이럴 때 손을 내밀 수 있는 존재로서 엘님이 계신다는 게, H님을 비롯한 우리 모두에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몰라요.
  • 2009/04/01 13:33 #

    정성 담은 덧글 감사합니다! H님도 이 덧글을 꼭 읽고 용기 내시면 좋겠어요. 제 생각에도 H님은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문제를 알고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고 피하려고 하지 않으니까요. 멋진 남자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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