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8th prescription_달달한 애정표현에 설레서 물어봤더니, 미안하대요

H님 :

(아래는 요약내용입니다.)

졸업을 하고는 대학 동기들과 종종 술자리도 가지며 친목도모를 하지요. 그런데 얼마 전부터, 오랫동안 친했던 오빠 하나가, 자기한테 시집오라는 둥 농담같은 말들을 던지기 시작했어요. 저는 그런 농담들을 받아주는 스타일은 아닌데, 그 오빠가 갈수록 호감 표현의 횟수를 늘리다보니 저도 그런 말들에 정색하지 않게 되었어요. 

꿈에 만나자, 사랑스럽다, 내 생각 해라, 뭐든지 다 해주겠다, 보고 싶다... 는 말들. 믿지는 않았지만, 어느새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나봐요. 술마시고 전화를 한다든지 하면 마음은 더 싱숭생숭해졌죠. 

한번은 단둘이 만나기도 했어요. 막상 만나니 어색하기도 했고, 좋기도 했죠. 그러나, 아무래도 신뢰가 가지는 않아서, 며칠 뒤 용기내서 정식으로 물어보았어요. 그랬더니, 어이없게도 그는 제가 그저 동생이라고 해요. 한달 동안의 고민이 5분도 안되어 정리된 거죠. 뒷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었어요. 제가 그런 애정표현은 여자친구에게나 하라고 말해주었죠. 그러자, 그는 미안하다고 앞으로 안하겠다고 해요. 

마음이 참... 착찹합니다. 어이가 없고 웃음이 나요. 저는 그 오빠가 잘 이해가 되지 않아요. 묘한 표현들에 화가 나기도 해요. 앞으로 그 오빠에게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뭔가 당한 것 같은 기분도 있어요. 전 상처받았죠. 




 

H님, 엘입니다.

그 오빠가 했던 모든 과한 애정표현들은, 정도가 약할 뿐 성희롱입니다. 꼭 신체적인 접촉을 해야 그것이 추행이고 희롱이고 성폭력인 것은 아니에요. 

애정표현을 빙자한 무례한 농담들, 여자들은 누구나 겪습니다. 저 역시 그랬고요. 

막상 이런 상황에 부딪힐 때, 상대가 진심인지 아닌지 판단할 길이 없죠. 하지만, 분명히 나의 본능은 뚜렷한 이유도 모르면서, 막연하게 불안하고 두근거리고 불편합니다. 

그저 표면적인 말로만 판단하면, 그 오빠와 H님은 이미 사귀고 사랑하고 결혼까지 하고도 남는 상황이에요. 그런데, H님은 그 사람이 지인이고 나보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쉽사리 그의 진심을 정색하고 묻지 못했죠. 우리는 상대의 진심을 의심하는 일은 나쁜 일이라고 교육받아 왔으니까요. 우리는 연장자들, 특히 아버지와 오빠에게 순종할 것을 배우고 자라죠. H님은 자신의 불안한 마음이 그를 향한 설레임이라고 결론도 내려보았어요. 만약 H님의 결론이 진실과 닿을 수 있었다면, H님은 저에게 이런 메일을 보낼 일도 없었겠죠. 

H님.

지금부터, 일상에서 부딪힐 수 있는 성희롱의 양상을 알고 이해하고 대처하는 법을 알아두어요. 

왜냐하면, 성평등지수가 낮은 문화권, 인권수준이 낮은 사회에서 살면, 여자로서 이러한 일이 일생 동안 수십 번, 수백 번 부딪히거든요. 사회 생활을 하다보면, 인간관계를 겪다 보면, 이런 남자들은 정말로 부지기수죠. 

매번 속수무책으로 상처받을 수는 없잖아요. 그들이 벼락맞듯 한번에 성평등의식이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요. 

H님은 의도치 않은 감정낭비를 해야했죠. 

사람의 말을 신뢰하라는 신념과 배치되게, 자꾸만 의심스러운 말을 듣고 사람을 의심하는 불편함을 겪었습니다. 그가 내뱉는 낭만적이이기만 한 '애정표현'에 흔들리고 괴로웠습니다. 

H님이 화가 나고, 불쾌하고, 어이가 없고 황당하다면 당연합니다. H님은 자신의 존엄을 지킬 권리가 있습니다. 존중과 예의를 지켜야 마음이 편안한데, 인간관계의 기본원칙이 깨어졌어요. 

그래서, H님은 그의 달콤한 말들이 편하지 않았어요. 

그는 H님이 곤란해하고 당황하는 것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그런 표현들을 계속했죠. H님이 대놓고 싫어하는 티를 내지 않으리라는 건, 화를 내거나 저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이용했어요. 

많은 남자들이 이런 식으로 행동해요. 그들은 주로 직장 상사이거나, 동료이거나, 선배나 후배이거나, 나이가 많거나 어리거나, 보통 관계에서 좀더 힘을 가진 쪽이에요. 그들은 존중과 예의를 모르는 무식쟁이들이고, 매너를 모르는 꼬꼬마들이고, 정식으로 교제를 시작할 용기도 없는 머저리들이고, 자신의 만족을 위해 타인의 감정을 유린하는 나쁜 사람들이죠. 

그러니까, 마음껏 욕하세요. 나이만 먹고 문명화도 덜 된 인권감수성 낮은 꼬꼬마들은 욕 먹어도 싸요!!!!!!!!!!!!!

아, 그래요. 저도 화가 나요. 제 과거의 기억과 겹쳐져서 그래요. 

저는 제가 겪는 감정적 불편이 무엇인지도 잘 몰랐어요. 오히려 제가 빈틈을 보여서 그들이 그런 식으로 행동한다고 자책하기도 했어요. 내가 너무 매력적이어서 그들이 정신을 잃고 선을 넘는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어요. 생각을 걸러낼 줄 모르고 감정과 욕망에 충실한 것이 남자들의 특징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죠.   

하지만, 정답은 이래요. 

그들은 나를 인격적으로 존중하지 않았어요. 한 명의 인간으로서 존중하지 않았어요. 그저, 동생이라는, 동료라는,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순진하게 웃으면서 당황하고 어색해하는 나의 반응을 즐겼지요. 

그들이 그러한 애정표현을 할 때, 내가 다르게 행동했다면, 그들이 잘못했다고 바로 지적했다면, 그들도 제대로 사과하고 잘못을 인정했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저에게, 그것이 언어적인 성희롱이고 나쁜 일이고 성폭력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죠. 저도 나이가 아주 들어서야, 내가 원치 않는 말을 듣지 않을 권리가 있고,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일방적으로 당하고 참아야 할 의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이러한 폭력은 지인에게서 일어나기 십상이죠. 그들은 친근함을 근거로, 그 위에 불쾌한 애정 표현을 쌓아가요. 얼핏 처음에는 칭찬 같죠. 얼핏 처음에는 나의 매력을 인정해주는 말인 것 같죠. 

그러나, 그들은 여성들이 당황하면서도 거부하지 않으면, 조금씩 수위를 올려요. 악의가 없었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진짜 연애상대에게 진지하게 프로포즈할 때와 나를 놀릴 때의 태도나 말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 아는 사람들이에요. 그들도 연애하고 결혼할 때는, 이런 식으로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테니까요. 나와 그녀들을 구분해서 대하는 거죠. 그들에게 나는 그래도 되는 만만한 대상이었요.  

그러니까, 앞으로는 만만한 사람이 되지 말고, 유사한 상황에서 어떤 대처를 할 수 있을까 메뉴얼을 정리해봅시다. 

1. 비일상적인 시간, 밤 시간이나 새벽, 내가 바쁠 때 연락을 한다면, 전화를 받을 수 없을 정도로 바쁘니, 다음에 통화합시다, 하고 끊어요. 앞으로는 너무 이른 시간이나 늦은 시간에 연락하지 말라고 해요. 

2. 술을 마시고 전화하거나 연락한다면, 예의를 갖추라고 지적해주고, 술을 마신 채 전화하는 것이 불쾌하다고 말해요. 

3. 맥락없이 또 비슷한 애정표현을 한다면, 즉시 불쾌함을 표시하고, 이런 표현을 하지 말라고 해요. 사과를 하라고 하세요. 충분히 정색하세요. 다같이 모이는 자리에서라면 더욱 정색하세요. 내가 분위기를 깨지 않나 걱정 마세요. 내가 참고 웃으며 넘어가면, 주변 사람들도 사실은 마음 불편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를 용서하세요. 그는 내 남자가 아니죠. 괜한 분노와 미움으로 내 마음을 어지럽히지 말아요. 그는 나에게 한 짓이 나쁜 일인지 잘 몰라요. 알았다고는 해도, 어느 정도 허용된다고 생각했어요. 

말 그대로 개념이 없었어요. 성평등의식이 낮았어요. 그들을 교화시키거나, 개념을 주입하는 수고까지는 하지 않아도 되어요. 그를 미워할 시간에 나를 존중해주는 다른 관계를 도모해야 시간낭비가 적어요. 그리고, 앞으로 꾸준히 NO라고 말하는 연습을 해요.  

한가지 팁을 드리자면. 

저는 낯선 사람을 만날 때 적의가 없다는 것을 나타나기 위해 미소를 지으며 예의를 갖추어 부드럽게 말하는 사람이랍니다. 대부분의 인간관계에서 이런 저의 태도는, 빨리 친밀함을 쌓게 하고 속에 있는 진심을 드러내기 쉽게 해요. 

그런데, 가끔은 단지 제가 다정한 미소와 친절한 태도를 취한다는 것만으로, 저를 만만하게 보고 쉽게 안전거리를 넘어서는 무례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럴 때는 정색하면 돼요. 웃으면서 화를 내고 사과를 받아요. 연습하면 점점 내 존엄을 지키는 일이 쉬워져요. 

세월이 쌓이면 더 좋아져요. 자신을 지키고, 또 나와 비슷한 일을 겪는 주변 사람들을 도울 수도 있게 되죠. 앞으로는 더 강해지도록 합시다. 




 




(*2016년 5월 12일 리라이팅함.)



덧글

  • 2009/06/27 02:30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09/06/27 02:33 #

    아주 일부만 소개드린 겁니다. 더 자세한 내용이 있지만, 저도 너무 울컥 하여 생략하였습니다.
  • 2009/06/27 22:16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09/06/27 23:25 #

    아이쿠. 여전히 그런 문자들을...그런 멘트들을... ㅠㅅㅠ 아아아아아아 화가 나는군요! 메신저, 문자 등등 우적우적 씹어드세요. 무시하는 것이 상책일 듯 해요.
  • MrCrazyani 2009/06/28 02:21 #

    헤픈남... -_-; 남자들도 자기 행동이 얼마나 헤퍼보이는 지 알아야 해요! 그리고 이런 남자의 행동들이 성폭력이라는 거, 매우 동감합니다! -_-!
  • 2009/06/28 20:29 #

    아마도 여자아이들에게 그렇게 행동해도 된다고 머리 속에 개념이 박혀있겠죠. 그가 보고 자란 환경이 그렇게 만들었을 거에요. ㅠㅅㅠ
  • 진사야 2009/06/29 11:59 #

    오 마이 갓; 읽어 내려가다가 절로 식겁했습니다. 이건 뭐 상상을 거뜬히 뛰어넘는데요?ㅠㅠ 정말 모든 남자들이 알아야 하는 내용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 상대에게는 상처가 된다는 사실이요.
  • 2009/06/29 14:09 #

    여자들은 식겁하죠. ㅠㅅ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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