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9월 25일
396th prescription
R님 :
(아래는 요약내용입니다.)
우리는 불같은 연애는 아니지만, 평온하게 잘 만나고 있어요. 우리가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스킨쉽의 수위가 올라갔고, 그가 이대로라면 섹스도 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고 말했죠. 저는 엘님의 처방전에서 본 섹스관을 물어 볼 좋은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어요.
그에게 섹스의 의미에 대해서 물어보자, 그의 대답은 시원찮았죠. 남자는 원래 그렇대요. 서로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것은 강요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로 마무리하긴 했지만, 제가 생각한 대화는 아니었어요. 그는 아직 섹스관이 정립되지 않았죠. 저는 그가 저만큼이라도 기준이 있었으면 해요. 대화 후에 그가 왠지 어리게 느껴졌어요.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저는 첫경험 전에 남자친구가 함께 하는 관계에 대해서 더 생각하는 좋은 남자로 만들고 싶어요.
R님, 닥터 엘입니다.
R님이 남친을 어리게 느끼는 것은 괜한 생각이 아니랍니다. 그는 실제로 어립니다. 경험이 없죠. 호기심은 왕성할 때구요. 하지만, 그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많은 남자아이들이 닥치기 전에는 섹스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지 못합니다. 그가 알고 있는 지식은, 어둠의 경로를 통한 것일 확률이 높죠. 우리나라의 원시적인 교육부 정책에 따라 공교육에서 성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았을 확률도 희박하고, 그렇다고 부모님에게서 성교육을 받았을 확률 역시 기대않는 게 좋을 거에요. 많은 부모님들이 딸에게는 방어 위주의 부분적인 성교육을 실시하는 반면, 아들에게는 피임에 대한 주의 정도로 그치곤 하니까요. 이번에 다섯살이 된 제 조카를 보면 유치원에서부터 성교육이 시작되는 것 같고, 부모님들에게도 가정교육 상의 가이드라인이 배포되는 듯 했어요. 하지만, 지금 R님이 만나야 하는 남자들은 10여년 전의 남자 연애인들과 다름없는 성교육 혜택을 받았다고 해도 무관할 거에요. 요약하자면, 같이 공부하셔야 한다는 거죠.
어떤 남자들은 성과 삶, 사랑과 연애, 결혼의 의미에 대해서 깊이 고찰해요. 나름대로 답도 찾아놓고, 기준도 세우죠. 저는 그런 남자를 만나기 위해 오랜 세월을 허비했어요. 잘 없더라구요. 그러다가 겨우겨우 만난 것이 지금의 남자친구에요. R님이 만난 남자친구는 연애상대로서는 부족함이 없었을 거에요. 그러나, 모든 연애상대자가 섹스도 경험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에요. 연애하다 스킨쉽도 하고 섹스도 할 수 있지만, 연애관과 섹스관, 사랑관이 모두 나의 범위 안에서 허용가능한 것일 확률은 매우 낫다는 뜻이랍니다. 그러니까, 그에게 섹스관에 대해서 질문하기 전에, 사랑에 대해서 충분히 물어보세요. 사랑에 대한 이해가 비슷하다면, 그 대화의 끝은 반드시 섹스로 이어져요. 사랑은 타인을 향한 지향성이에요. 그 지향성은 몸과 마음의 지향성을 뜻해요. 마음이 가는데 몸이 가지 않을 수 없죠. 그러나, 몸을 사용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복잡하고 의미심장하죠. 당연히 많은 준비와 기다림이 필요해요. 누구나 사랑하고 섹스하고 결혼하는 것은 아니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100%의 사랑, 100%의 섹스, 100%의 결혼은 불가능에 가깝답니다. 순도 100%의 행복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에요. 삶은 언제나 부족하고 빈틈이 생기고 흔들리는 속에서 꽃피는 거죠. 우리는 신이 아니라 사람이니까요. 그러나,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의 지향성과 기준은 선택할 수 있고, 그것을 책임질 수 있어야 해요. 그래야, 타인을 상처입히지 않을 테고, 그래야, 타인에게서 상처입지 않을 수 있거든요.
R님부터 답을 찾도록 해요. 책과 칼럼을 찾아보아요. 제 포스트들이 도움이 된다면, 태그 검색을 통해 마음에 드는 것들을 정리해서 프린트해서 남친에게 보여주어도 되어요. 스스로에게 다양한 질문을 해보세요. 섹스 자체에 대한 질문도 좋지만, 보통은 사랑과 연애로 이어지는 포괄적인 질문들이 오히려 섹스의 의미에 다가가는 데에 진짜 정답을 보여줄 거에요. R님이 어느 정도의 답을 찾았다면, 시간들 들여 반복해서 남친과도 대화를 해야 해요. 처음에는 어색할 수 있어요. 그러나, 그걸 넘어서지 않으면, R님은 근사한 첫경험을 가질 수 없죠. 남친이 짜잔 하고 모든 것을 준비해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걸 안다면 두 사람이 힘을 합해야만 하잖아요.
사람마다 성에 대한 기준은 다 다르죠. 윤리도덕도 천차만별이에요. 제 남친은 진정한 사랑을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믿었다고 해요. 저로서는 그가 왜 그런 판단을 했는지 모르지만, 그는 어떤 영화를 보고 너무나 큰 감명을 받았고, 평생동안 그런 사랑을 꿈꾸었대요. 그리고, 우연히도 그가 사랑의 기준으로 삼았던 어떤 영화와 제가 감동하고 부러워했던 영화는 똑같았죠. 제가 섹스에 대해서 질문하면 그는 몇번이라도 자신이 알고 있는 기준과 생각에 대해서 당당하게 말했어요. 아마도 그의 생각은 매우 오래 전에 정리되어 있었던 것이 분명했어요. 그는 어렸을 때부터 사랑과 섹스, 연애와 결혼의 관계에 대해서 고민해야 할 일들이 많았고, 그래서 고통 속에서 그런 것들을 정리한 것 같았어요. 여성이 이용당하거나 상처입게 되는 상황에 대해서도 이해가 깊었고, 그는 남성에게는 여성을 배려하거나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죠. 물론, 여성도 마찬가지에요. 자신이 저에게 보호받거나 배려받아야 할 권리 또한 그는 명확하게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서로 다른 삶을 살아왔고 다른 경험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몸과 마음을 나누며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내게 되었지요.
제가 볼 때, 다른 방법은 없어요. 더 많은 텍스트를 공유하고, 더 많은 대화를 하는 방법 밖에 없죠. 그리고, 아직 어리구나, 싶은 남자와는 조금 더 시간을 충분히 갖는 것이 맞아요. 그가 남자들은 원래 그렇다, 라고 대답하는 배경에는, 그의 주변에 제대로 된 성인 남성으로서의 롤 모델이 없고 또래들도 비슷한 문화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만약 이 남자를 더 성숙한 어른으로 만들고 싶고 그런 수고를 감당할 수 있겠다, 각오했다면. 힘들어도 공부하고 대화하고 가르치세요. 손놓고 기다린다고 저절로 어른되긴 힘들죠. 가장 빠른 방법이 있다면, 제대로 된 성의식과 기준을 가진 새로운 남자와 연애하는 것이긴 합니다만. 어느 쪽이 더 쉽겠나요?
이 글과 관련있는 글을 자동검색한 결과입니다 [?]
- 395th prescription by 엘
- 390th prescription by 엘
- 394th prescription by 엘
- 385th prescription by 엘
- 392nd prescription by 엘
# by | 2009/09/25 19:19 | LOVE&MEMORY(301st~) | 트랙백 | 덧글(6)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엘님 말씀대로 마음이 향하면 몸이 자연스레 따라가듯
즐겁고 행복한 스킨십을 나누고 있어요. (그도 저도 스킨십을 좋아하는 편이죠)
때때마다 그는 저를 충분히 배려해주고 제 옷 매무새를 정리해주고
저를 아껴주고 사랑해준다는 생각을 많이 들게 만들어요.
그렇지만 저도 제 허용범위 안에서만 가능하다..라고 생각했는데
남자친구는 정확히 성립된 그만의 선이 없었어요.
그리고 또 어떤 선을 넘었을 때 제가 힘들어한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했죠.
그래서 제가 먼저 용기를 내 이야기를 꺼냈고,
지금은 서로 충분히 대화하고 적정 선을 찾아가는 중이랍니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다 이때다 싶어 제 섹스관에 대해 확실히 이야기하게 됐어요.
제가 그보다 다섯살이나 어려서 그런지.. 처음에는 조금 놀라는 눈치더라구요.
그러나 곧 그의 생각을 제게 이야기해주었고 구체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었어요.
오히려 제 입장을 확실히 이야기하니까
그는 저를 더 귀하게 지켜주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더군요.^^
사실 저는 사랑과 섹스에 대해서 오래도록 생각하고 가치관을 확립해왔지만
밖으로 말은 잘 꺼내지 못하는 부끄러움 많은 사람이었어요.
그렇지만 엘님 덕분에 용기를 낼 수 있었답니다.
그리고는 깨달았어요.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에 이런 일들에 대한 대화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말이예요.
매일 좋은 글을 읽으면서 언젠가 나도 상담메일을 보내게될까 ^^ 생각했는데
이 글을 보니 댓글을 안남길 수가 없네요 :) 호호-
앞으로도 꾸준한 포스팅으로 제 연애를 도와주세요 엘님! +_+
하지만, 두 분은 연애 중이시고, 이제는 진지해져도 될 때죠. ^ㅅ^ 그리고, 많은 여성들이 성담론을 펼치는 것에 대해서 어색해하고 부끄러워 해요. 그것은 평소에 늘 나누는 테마가 아니라 그래요. 그렇지만, 어른이 된다는 것은, 꼭 필요한 대화와 가치관에 대한 기준을 당당하게 펼치는 것이겠지요.
어렸을 때 사촌언니에게서 들었던 '섹스'라는 말은 정말로 나쁜 말인 줄로만 알았어요. 무엇인지 몰라서 무서웠고, 호기심은 생겼지만, 어른들만 할 수 있는 나쁜 놀이라고 생각했어요. 어린이들은 알면 안되는 무시무시한 괴물 같은 것이었죠. 하지만, 저는 지금에 와서는... 성담론은 처음부터 건강하게 누구에게나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언젠가는 청소년들도 초보 연애인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성담론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이 제 계획 중 하나랍니다. ^^
음... 자주 오셔서 답을 얻고 가시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엘님 오랜만이에요~ 글 감사히 잘 읽고 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