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3rd prescription_결혼에 대한 가치관이 달라 시간을 갖자고 했습니다

I님 :

(아래는 요약내용입니다.)

저희는 20대를 함께 보내고 삼십대를 맞이한 커플입니다. 그는 좋은 사람이고, 제가 힘들었을 때도 늘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사람이죠. 제가 상황이 나빠질수록 그는 오히려 결혼을 하자며 절 다독였지만, 전 그의 따뜻한 마음을 볼 여유도 없었어요. 그러다, 지난 연휴에 연락이 안되어, 나중에서야 겨우겨우 만났는데, 그가 어렵게 얘기를 꺼내더라구요. 늘 결혼하면 잘 할 수 있다 생각했는데, 부모님 부쩍 늙으신 것을 뵈니, 갑자기 현실적으로 자신이 없어졌다는 겁니다. 저는 그런 말까지 듣고는 그에게 부담주기 싫어, 그렇다면 아예 관계를 정리하자 했고, 그는 차라리 빨리 시작하자며 결혼 시점을 제시했습니다. 저는 그보다는 조금 늦게 하고 싶다고 말했구요. 그러다 서로 팽팽하게 의견대립이 계속되었습니다. 이후로 그는 계속 고민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는 서로 시간을 좀 갖자고 했고, 저는 불안해요.

우리는 지난 시간동안 한번도 헤어지잔 말을 한 적이 없어요. 그런데, 잠시 시간을 갖자는 말은, 작은 일이 아니죠. 저는 제가 그동안 못 전했던 말까지 다 전하고 싶어서, 그를 다시 만났어요. 그는 그래도 그가 지정한 시간만큼은 떨어져 있는 것이 필요하다며 단호했죠. 저는 여전히 불안합니다. 그가 정말로 그 때가 되면 다시 연락할까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너무 뚝, 하고 연락을 끊는 건 아닌 거 같아, 안부 문자라도 보내고 싶은데 어떨지 모르겠어요.










I님, 엘입니다.

서로 간의 신뢰가 두텁다고 생각하고, 그가 평소 거짓을 말하는 성품이 아니라면, 그가 약속한 시간 동안은 혼자 지내는 연습을 해보세요. 그가 I님에게 굳이 자신이 정한 시간만큼은 시간을 갖자고 여러 번 강조하였다면, I님도 마음 독하게 먹고 그에게 연락을 하지 마세요. 안부문자도 그저 보내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답을 기다리게 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도 혼자서 생각하는 시간이 혼자가 아니게 될테지요.

I님은 아마도 지금 그가 시간이 지나고 다시 돌아올 지 아닐 지 무척 궁금하실 겁니다. 그러나, 시간이 모든 것을 말해주겠죠. 그가 실제로 연락을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I님의 선택 중에서 가장 바람직한 선택은 그를 온통 믿는 것 뿐입니다. 그를 의심하든 전적으로 신뢰하든, I님이 보내게 되는 시간은 정해져있죠. 결과 또한 I님이 대답을 기다리는 입장이라면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I님이 보다 더 충실하고 의미있게 이 시간을 보내는 방법은, 그를 믿고 기다리는 방법 뿐이지요.

I님. 그에게 시간을 주세요. 그리고, I님도 두 사람의 관계를 돌아보세요. 혼자 있으면서, 그에게 더 잘해주고 싶었던 것, 더 전하고 싶었던 말, 차근차근 정리해보세요. 기록으로 남기는 것도 좋습니다. 그에게 감사해야 할 것들, 그에게 못해주었던 것들, 많고 많을 거예요. 청춘을 함께 하며 함께 성장하는 연애란, 흔치 않죠. I님은 그를 기다리는 동시에, 알람이 울릴 때까지 지난 시간을 돌아보세요. 그렇게 혼자 있는 시간을 채워 나가십시오.

그리고, 한가지 더 할 일이 있으십니다.

그도 아직은 정답을 갖고 있지 못할 거예요. I님은 결혼에 대해서 더 진지하게 생각을 해보셔야 합니다. 남들을 위한 남들만큼 하는 결혼식을 할 것인가. 아니면, 두 사람만의 약속을 축복하는 조촐하고 소박한 결혼식을 할 것인가. 집안과 집안이 결합하는 결혼은 비용도 들고 준비할 것도 많습니다. 

하지만, 근사한 결혼식, 근사한 사진, 근사한 신혼여행, 근사한 혼수, 근사한 신혼집, 이런 것은 어쩌면 전혀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I님은 자신의 결혼관을 제대로 정립하세요. 저는 어렸을 때는 당연히 근사한 신혼집, 근사한 웨딩 촬영, 근사한 혼수와 근사한 신혼여행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답니다. 하지만, 왜 그러한 것이 시작되었는지 근본부터 생각해보면, 그것은 남들이 만들어놓은 관습법에서 출발한 것이기도 합니다. 

단지 두 사람이 사랑하여 함께 사는 데에는 많은 물건들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대출 받아가며 무리해서 식을 준비하고, 얼굴도 모르는 친척들에게 밥먹여줄 이유도 없죠. I님은 어떤 결혼과 어떤 결혼식을 생각하십니까. 자신의 손으로 만드는 진짜 결혼을 생각해보세요. 요즘은 스몰 웨딩도 많고, 결혼식 자체를 생략하는 커플도 있습니다. 많은 문화권에서 공장식 결혼보다 직계 가족만 함께 하는 가족만의 결혼식을 합니다. 결혼식은 형식이지 본질이 아닙니다. 결혼 또한 의미가 있어야 선택할 수 있는 사회적 계약이지, 인생의 필수요소가 아니죠. 

그에게 연락이 왔을 때, 자신이 말하는 비젼을 설명하세요. 포인트는, 집안이나 남자한테 기대마세요. 내 손으로 하는 결혼만이 진짜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결혼식 이후의 삶도 자신의 손으로 온전히 책임질 수 있게 됩니다.

저는 얼마 전에 호텔에서 하는 결혼식에 다녀왔답니다. 주례사는 부모님들과 집안의 훌륭하신 학벌과 사회적 업적을 늘어놓느라 시간이 다 갔고, 신랑신부 이름도 잘 모르는 먼 친척들은 맛없는 스테이크를 욕하고 있었죠. 신랑과 신부는 헬퍼의 도움으로 수차례 옷을 갈아입고, 재입장하고, 테이블마다 돌며 고개를 꾸벅꾸벅 숙이고, 사람들은 시간 맞춰서 박수를 쳤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훌륭하고 근사한 결혼생활을 해나갈 거에요. 외제차를 몰고, 명품백을 들고, 자주 해외 여행을 가겠지요. 그들의 자녀들도 비슷한 삶을 살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결혼도 매우 훌륭합니다.

하지만, 저는 I님과 I님의 남자친구가 만드는 결혼은 이보다 더욱 훌륭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단한 삶도 웃음으로 채우는 그런 결혼, 꼭 보여주시고, 자랑해주시기 바랍니다. 행운을 빕니다.







덧글

  • 2009/10/14 17:47 #

    포스트를 걸어놓지 않으셔서, 처방전 번호를 알려드리지 못했습니다.
  • purplia 2009/10/15 10:27 #

    엘님, 잘 보고 갑니다. 고마워요.
    그리고 엘님의 글을 보면 멋진 분이라는 판단이 절로 들어요. ^^
  • 2009/10/15 17:35 #

    별로 안 멋져요. 나이만 먹었죠. 흐흐
  • 팡야러브 2009/10/15 12:10 #

    호텔 음식은 맛이 없어요 -ㅁ-;
    그리고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책에 나오듯이 남자는 일정시간동안 동굴에 혼자 있어야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ㅎㅎ 남자들이 동굴에서 나올때는 그냥 나오질 않지요.. 뭔가 결심을 하고 나올것이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 2009/10/15 17:36 #

    동굴형 남친이 있고, 비동굴형 남친이 있는 듯 해요. 제 남친은 아무리 힘들어도 동굴에 안 들어가는데, 어떤 남자들은 자주 들어간다고들 하죠. 제 남친은 ON/ OFF 형 남친인 듯. OFF 모드일 때는 일곱살이 됩니다.
  • 로키 2009/10/15 13:19 #

    룸메이트였던 후배도 작년에 그런 화려한 결혼식을 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아나운서가 사회를 보고, 전직 국무총리가 주례를 보고... 그애는 그런 걸 누릴 만한 실력과 자격이 충분한 아이라서 더욱 멋있었어요. 하지만 왠지 부럽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더라고요. 제가 결혼한다면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지금부터 생각해 봐야겠네요.
  • 2009/10/15 17:37 #

    그런 결혼식이 필요한 집안도 있고, 아닌 커플도 있고... 여러가지겠지요. 지난 번엔 온갖 연예인들과 국회위원이 화환 보내는 결혼식에 갔었는데, 역시 집안 설명에 주례사의 3/4이 지나가더라구요.
  • 2009/10/15 19:00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09/10/16 00:27 #

    비공개님께서 행복한 소식 알려주시는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아마도 여기 찾아와주시는 다른 분들도 모두 기뻐하지 않으실까 싶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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