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17일
416th prescription
L님 :
(아래는 요약내용입니다.)
저에게는 연상의 남친이 있죠. 그는 외적 조건이 멋져 다들 저를 부러워해요. 그를 이전부터 알았고 그가 여러 번 고백했지만, 그는 성품이 좋지 않았어요. 배려도 모르고, 자기애는 지나치고, 언어는 거칠었죠. 저와는 가치관이 달랐어요. 그래서 저는 매번 거절했었죠. 그러다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본 자리에서, 그는 내면이 조금은 자란 것 같았어요. 결국 저는 그의 가능성을 보고 프로포즈를 받아들였습니다.
저는 열혈 수험생이에요. 그래서, 그에게 미리 양해도 구했습니다. 핸드폰도 없고 연락도 안되고 데이트 시간도 많이 할애할 수 없지만, 괜찮겠냐고요. 저는 자투리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그와 데이트하고 연락할 수 있도록 힘썼어요. 그는 항상 다 괜찮지만, 시험 끝나면 무조건 나에게 잘 하라는 말이 입버릇이었죠. 그는 늘 할말이 많은 사람이었어요. 그러다, 시험이 임박해졌고, 아주 약간의 여유도 없어졌죠. 제가 너무 힘들다고 하자 그는 연락 안해도 되니 공부에 집중하라고 했죠. 그리고...
그는 제가 아주 잠깐 쉬거나 가족을 만나는 걸 알게 되면, 자신이 우선순위가 아니라는 것에 화가 난다고 했어요. 우린 자주 마음이 상했고, 그는 내가 자기 여자가 되었고, 그래서 참아주는 거라고 했어요. 또한, 자신이 이렇게 기다리고 참는 것에 제가 늘 감사를 표해야 한다 했죠. 저는 시험 후에는 무조건 잘하라는 표현이 조금은 부담스럽다고 말했어요. 그러자 그는 니가 날 덜 사랑하나보다, 라고 했고, 이후에 연락이 없어요.
그는 교제한 지 한달만에 배려하는 남자에서 참고 있으니 잘 하라는 남자로 변신했죠. 제가 정말 배려가 부족했던 탓인지, 제가 힘든 상황을 제대로 전달을 못한 탓인지 모르겠어요. 저는 그저 제 미래를 위해 공부하고 있는데, 왜 이렇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야 하죠? 그와 대화할 때 그는 항상 자극적인 말로 저를 상처줍니다. 애초에 제가 우려했었던 그의 가치관과 성품이 그대로 드러낸 셈이죠. 그의 인품 때문에 헤어지자고 하면 제가 이기적인 걸까요?
또한 그는 결혼과 성추행에 대한 토픽에서, 제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말을 한 적도 있습니다. 솔직히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남친이 무서울 정도입니다.
저는 그를 사랑하지만, 지쳐버렸습니다. 그의 말들이 저를 괴롭힙니다. 그에게는 여러 번 제가 힘든 점을 말했고 그는 달라진다고 했지만, 그는 여전합니다. 그는 몇년 간 기다렸고, 그런 그와 헤어진다면, 저에게 다시 사랑이 올까 두렵기도 합니다.
L님, 닥터 엘입니다.
많이 고민하지 마세요. L님은 지금 마음 고생을 심하게 하고 계시죠. 그리고,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고비도 넘어가셔야 합니다. 이렇게 소중한 시간들을, 자신과 맞지 않고 납득하기도 힘든 연애를 하며 낭비할 이유는 없습니다.
연애할 때 상대의 인품은, 언제나 매우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격적으로 완성되어 있고, 인간관계가 원만하고, 타인에 대한 배려가 몸에 익은 사람조차도, 자신의 연애에서는 나쁜 남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물며, 평소에 믿음직하지 못한 인품을 가진 남자가, 연애할 때 좋은 남자가 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합니다. 아무리 그가 오래 기다려왔다고 한 들, 그것을 L님이 책임져야할 이유는 조금도 없습니다. L님은 이미 여러 번 거절했고, 그는 그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기를 불태웠을 뿐이에요. 지난 시간까지 보상해달라 벼르는 마음을 가진 남자와 어떻게 연애하겠습니까. 게다가 입버릇마저 나중에 잘해야 한다, 인 사람한테요. 저 같으면 너무 무거워서 한발짝도 걷지 못할 거에요. 그런데, 용케도 한달이나 버티셨습니다.
보통 여자가 남자의 프로포즈를 거절할 때는, 본능적인 예감이 작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L님의 거절이 한두번이 아니라 여러 번이었는데도, 그가 계속해서 프로포즈를 한 것은, 그가 실패를 인정하기 힘든 성격이고, L님이 거절의 이유를 정확하게 밝히지 않은 탓도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두 분이 공적으로 이미 지인 카테고리에 속해있고, 한번의 거절 이후에도 계속해서 접점이 발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더더욱 자신의 실패를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독점욕이 강하고, 인간관계에서 손해보기 싫어하는 성격을 보이고 있지요. 그래서, 그는 타인이 자신과 다르다는 것을 잘 모르고, 연애 역시 프로포즈의 수락 시점에서부터 자신의 기준에 따라 어떠한 의무와 권리가 생긴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은 늘 옳기 때문에, 상대를 비난하는 일에도 스스럼이 없고, 자신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을 때에는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핑계거리를 찾는 데에 여념이 없겠지요. 그는 상처가 많은 사람이고, 그래서 방어 본능도 강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가시를 세우기 때문에 오히려 타인에게서 더 많은 외면을 당하는, 불쌍한 사람이기도 하죠. 그러나, 연민 때문에 자신과 연애관이 맞지 않는 사람과 억지로 만날 수는 없는 일입니다. L님이 판단해야 할 기준은 오직 하나입니다. 나와 맞는 사람인가, 아닌가. 판단지점은 결혼과 성추행에 관련한 발언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나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무섭다기보다 너무나 의아해요. 어떻게 하면 이런 생각도 할 수 있나. 허허허.
그가 만약 제대로 된 연애도 하고 사랑도 하길 원한다면, 그는 타인을 관찰하고, 책을 많이 읽고, 사랑을 공부해야 할 것입니다. 그 전에는 누구와 연애를 해도 삐걱거리게 되어있습니다. 그걸 L님이 다 감수하시기에는 L님이 너무 지쳐있잖아요. 사랑하는 것도, 듬뿍 사랑받아야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까, 연애가 힘들면 쉬세요. 그래도 됩니다.
L님, 그에게 전하는 이별의 말은 간단할수록 좋을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맞지 않는 사람인 것 같아요. 늘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더 이상의 말이 필요없을 것 같습니다. 두 분이 맞지 않는 건, 너무나 명백하니까요. 한달도 되지 않아, 최초의 헌신적인 태도가 내 여자니까 넌 나에게 잘 해야해, 로 바뀌는 남자는, 두달 뒤면 그 목소리가 더 커질 겁니다. 굳이 그것까지 확인하지는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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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 2009/10/17 19:28 | LOVE&MEMORY(401st~) | 트랙백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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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드는 생각인데, 엘님 상담에는 실존철학적인 내용이 있는 것 같아요. 물론 엘님은 의도하지 않으셨겠지만, 아마 엘님의 삶 자체가 자기 자신의 실존에 대해 질문하게 만들었겠죠. 실존철학에서는 '내가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에서부터 모든 사유를 시작하게 돼요. 그리고 자신의 삶을 절대적인 것 - 신이나 죽음 - 앞에 두고 근본적으로 다시 돌아보게 하죠. 엘님의 글에는, 엘님이 살아오면서 몇 번이나 그런 과정을 거쳤다는 증거들이 녹아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다른 분들이 엘님의 글을 보고 힘을 얻는 거겠죠?
힘들다, 고통스럽다, 라고 생각하는 그 지점부터 살아있다는 걸 느끼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해요. 행복하고 즐거울 때, 이게 삶이구나! 감사하구나! 하기가 쉽지 않지요. 그 행복과 즐거움도 고통을 겪어본 자만이 느낄 수 있는 감상인지도 모르지요. 되도록 덜 아프고 사는 게 좋지만, 그렇게 안 될 지라도, 잘 살아남는 방법은 분명히 있을 거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