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20일
419th prescription
O님 :
(아래는 요약내용입니다.)
엘님의 처방전을 읽다 보면, 연애란 무엇보다 자기자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데요, 저는 아직 인격적으로 완성되지 않았고 배려도 적고 인간관계도 폭넓지 않아 연애 못하겠구나, 싶어 우울해지기도 해요. 그런데 주변을 돌아보면, 나와 비슷한 사람도 잘만 연애하고 결혼하고 그런 모습도 보죠.
겉모습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나를 알고도 나를 좋아해줄까 불안도 생겨요. 막연한 불안을 벗어나고자 책도 읽고 밝은 친구들과 어울리기도 하지만, 저의 내면은 비관적이고 이기적이에요. 엘님이 부럽기도 하고, 이렇게 미숙한 저를 반성하기도 하죠. 누군가 다가오면 늘 뒷걸음치는 저는 무서운게 정말 많아요. 가을탓인지 기분도 싱숭생숭하고, 그동안 뭐했나 자괴감도 들죠.
격려의 말씀 부탁드립니다.
O님, 닥터 엘입니다.
O님. 걱정 뚝! 하세요. 인격이 완성된 사람은 아직 현생인류에게서는 발견된 바 없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가까운 누군가에는 어처구니 없는 어리광을 부리기도 하고, 이기적으로 되기도 한답니다. 누구에게나 존경받고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운 마음 없는 사람도 가끔 실수도 하고 생각치도 못한 곳에서 멍청한 짓도 할 거에요. 당연한 거 아닌가요. 완벽은 그저 이론이랍니다. 우리가 해야할 바는 단지, 인격이 완성된 사람을 지향하는 것. 그것 뿐입니다.
O님이 나는 부족하구나, 나는 아직 멀었구나,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 자체가 훌륭한 거랍니다. 정말로 못난 사람들은 그런 자기 인식조차 못하고, 남탓하고 환경탓하고 부모탓하고 정치탓합니다. 물론, 남탓, 배경탓, 가족탓하는 것이 자기탓보다 타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조차 무엇을 탓할 시간에 내 발전을 도모하는 게 훌륭한 태도 아니겠습니까. 저도 우울할 때는 남탓할 게 무척 많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속을 풀고, 제 자리로 돌아와 스스로를 들여다봐야겠죠. 바꿀 수 있는 거라면 바꾸기 위해 노력하고, 아닌 거라면 빨리 포기하는 게 답이잖아요. O님의 고민도 똑같습니다. 내탓하지 마세요. 내가 부족하면 더 채우면 되고, 아직 멀었으면 오늘 하루 한걸음 더 나가면 된답니다. 괜찮아요, 정말로. 다들 그렇게 사니까요. 어차피 완벽한 인간은, 그건 인간도 아니라고요. 신이지.
주변에서 잘도 연애하고 결혼하고 애도 낳고 집도 사고 차도 굴리고 해외여행가고 명품 가방 드는 거 부러워마세요. 저도 그러한 외부적인 잣대로 대면, 루저 중의 루저에요. 어느 하나 나이값하고 있는 게 없거든요. 타인의 기준, 이 사회의 잣대로 계산하자면, 지하철역 근처에서 투명인간처럼 떠도는 노숙자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치부되죠. 고양이를 혐오하는 사람들에게 쓰레기통을 파헤치는 길고양이는 그저 해충일 뿐이에요. 하지만, 노숙자도 사람이고, 길고양이도 생명이죠. O님도 저도 자신의 삶을 그저 살아가고 있을 뿐이에요. 어쩌면, 눈에 보이는 승리자들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패배자들이 더 많아요. 그들은 분명 승리하였죠. 경쟁에서 이겼고 남들이 선망하는 것을 가졌고 가진 것을 잃지 않기 위해 패배자들을 유령취급할 거에요. 혹은 동정하거나. 만약 O님이 나는 졌다, 라고 생각한다면, 그 기준은 스스로에게서 오는 것이어야만 해요. 하지만, O님을 불안에 빠뜨리는 모든 기준과 잣대는 O님의 내부에서 정말로 필요한 것들이 아니에요. 그것들은 모두 외부에서 왔죠. 잘 생각해보세요. O님의 삶에 정말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우리는 남들처럼 살기 위해, 남들만큼 살기 위해 지구에 온 게 아니죠. 하지만, 수많은 창문들이 우리를 남들과 똑같이 살라고 부추겨요. TV에서 LCD창에서 길거리의 광고판에서 잡지책 위에서, 수많은 네모들이 이렇게 해야만 해! 라고 소리치죠. 그런데, 그렇게 안해도 돼요. 그렇게 안해도 자신만 흔들리지 않으면 돼요. 하지만, O님과 저는 너무나 나약한 개인이고, 늘 커다랗게 소리치는 그들의 논리에 마음이 흔들흔들 하죠. 하지만, 나만 못났고, 나만 나약하고, 나만 외롭고, 나만 무기력한 거 아니에요. 다 똑같은데 잘 숨기고 살 뿐이에요. 그러니까, 한걸음만 더 걸어봐요. 내 길을 만들어가세요.
그리고, 저를 부러워마세요. 제 안에도 O님과 완전히 판박이로 똑같은 것들이 잔뜩 있으니까. 더 안좋은 것들도 많을 거에요. 인격적으로 성숙한 거요? 전혀 성숙하지 않았어요. O님과 똑같이 나는 못났구나, 생각하니까 나를 더 낮추고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는 일이라도 하려고 한 거에요. 이렇게 아무 것도 아닌 나라도,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다면, 이런 작은 마음들이 어딘가로 전해진다면,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 우주의 끝에 도착한다면, 제가 죽고 난 뒤라도, 누군가의 유전자에 기억되겠죠. 옛날 옛날 먼 옛날에, 아주 작은 사랑이 하나 있었는데, 그 때와 똑같이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네 예쁜 웃음이 바로 그 증거란다. 어떤 할머니가 손녀딸에게 이렇게 말해주면 좋겠어요. 이기적인 마음도 마찬가지랍니다. 나만 봐줘! 나를 더 생각해줘! 나만 사랑해줘! 소리치고 또 소리치죠. 내 안의 어린아이는 늘 배가 고프고 체온이 필요한 걸요. 그저 솔직해지도록 하세요. 내가 이렇다면, 다른 사람도 그런 구석이 있는 거죠. 사랑받고 싶은만큼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거죠. 그저. 그냥. 할 수 있는 만큼만. 두려움에 우뚝 멈추기도 하고, 그래도 용기내서 조금 더 걸어보기도 하고.
O님은 그저 멈추지 않으시면 되는 거에요. 고민하고, 반성하고, 동경하고, 그저 걸어나가세요. 가끔은 무서워서 주저앉을 수도 있어요. 그럴 수도 있죠, 뭐. 하지만, 너무 오래 있지는 마시고, 힘내서 일어나세요. 일어나서 또 조금 가요. 멈추지 않으면 돼요. 사랑을 향해서, 빛을 향해서, 진실을 향해서 걸어가세요. 그게 삶을 사는 거랍니다. O님도 저도 공평한 하나의 목숨을 받았어요. 이 삶을 각자의 방식으로 채우기만 하면, 큰 문제는 없을 거에요. 결국 어떻게 걸어도 종착점은 똑같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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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 2009/10/20 23:32 | LOVE&MEMORY(401st~) | 트랙백 | 덧글(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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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격이 완성된 사람은 아직 현생인류에게서는 발견된 바 없습니다."
악; 너무 공감가면서 슬프네요 ㅠ
삶의 방식은 하나가 아닐 거에요.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은, 일직선을 누가 빨리 달려가나, 밖에 없어요. 오로지 경쟁만이 삶의 기제죠. 저는 그게 너무나 힘들었어요. 예뻐야 하고, 젊어야 하고, 이겨야 하죠. 또한, 돈이 많아야 하고, 유명한 사람과 친해야 하고, 가족의 힘이 세야 하죠. 그런데, 왜 그래야 하죠???
저도 외부의 기준에서 완벽하게 벗어나지는 못한 것 같아요. 왜냐하면, 제 주변에는 이러한 기준의 성취를 이루어낸 사람들이 많이 있거든요. 다들 학비가 몇천만원하는 대학원을 나오고, 대기업에 다니고, 좋은 집과 차를 보유하고, 해외여행을 다니며 살죠. 책을 내고, 유명해지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명품백을 들죠.
어떻게 다 그렇게 한 건지 저는 몰라요. 저는 그렇게 살아보지 못했으니까요. 자꾸만 내가 가진 것과 그들이 이루어낸 것을 비교해보게 되어요. 부질없는 것임을 알면서도...
저도 끊임없이 찾고 있어요. 내 안의 기준. 진짜 삶의 의미. 하루를 보내는 방법.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 죽지 않고 걷는다면, 언젠가는 찾게 될 거에요. 저는 어려서부터 키도 작고 체격도 작고 뭐든지 꾸물꾸물 느린 아이였죠. 그래서 조금 늦는 것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비공개님도 천천히 찾아가도 괜찮다 생각하셨으면 좋겠어요. ^^
뭐든 하나 골라서 곱씹어보세요. 그걸 내 식으로 소화시키면 그것이 나의 기준이랍니다. 물론, 명상이 깊고 깊으면 번쩍! 하고 도통하여 인류의 고민과 지구의 안위를 한번에 해결하는 지혜가 나올 수도 있겠죠. 그럴 때는 꼭 저에게도 알려주세요!
잘 읽고 갑니다.
사랑하는 사람도 있고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만
우울해하는 저에게 외쳐주고 싶은 말들이에요.
감사합니다 엘님
각방을 쓸 때 서도, 서로 대화하려는 노력은 멈추지 않았으면 좋을텐데요, 그 부부. 제 주변에는 섹스리스 부부가 많은데, 파트너쉽으로도 잘 살기도 해요. 어느 한쪽이 불만이 쌓이기는 하지만, 딱히 못 참을 정도는 아니래요. 부부의 형태도 매우 다양한 것 같아요.
오랜만에 와서, 보석같은 글 잘 읽고 갑니다 ^^
정말로 못난 사람들은 그런 자기 인식조차 못하고, 남탓하고 환경탓하고 부모탓하고 정치탓합니다. ← 전 이 말이 절절이 공감되어요~ 제 자신의 부끄러움을 먼저 깨닫고 조용히 제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그런 사람 되어야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