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4th prescription_낯선 선배가 집에서 차 한잔 하고 가라는 말을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X님 :

(아래는 요약내용입니다.)

행사가 있어 약간 취기가 있는 상태로 버스를 탔어요. 그런데 낯선 선배 하나가 말을 걸었죠. 저는 선배라서 예의를 갖추어 대답을 하다가 그가 잠깐 차 한잔 하고 가라는 말에 거절하고 싶으면서도 딱 부러지게 말을 못하고 그 선배의 집에 발을 들여놓았어요. 

선배와 잠깐 정도 얘기하고 차마시다 집으로 돌아왔는데, 막상 집에 와서는 너무나 무서웠어요. 하마터면 큰일날 뻔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고, 내가 왜 그랬나 화도 났어요. 저는 그 선배가 나빴다는 생각이 들어요. 늦은 시간에 처음 본 후배에게 자기 집에 들리라고 권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좋지 않은 것 같아요. 제가 왜 딱부러지게 거절을 못한 건지 모르겠어요. 














X님, 엘입니다.

대인 안전거리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문화권마다 다르고 성별에 따라서도 다르고 지역별로도 차이가 있지요. 그 선배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가 밤늦게 여자 후배에게 차 한 잔을 권한 일은 매너있는 행동이 아니었죠. 선배라면 늦은 시간에 귀가하는 후배가 집으로 잘 들어갈 지 배려해야 합니다. 게다가 처음 본 사이였다면, 더욱 조심하고 예의를 갖추어야 하잖아요. 

처음 보는 학교 선배는 지인입니까, 타인입니까? 

당연히 완전 모르는 타인입니다. 알고 보니 같은 학교, 알고 보니 같은 학부, 알고 보니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 알고 보니 동향, 알고 보니 같은 부대, 알고 보니 동갑. 그런데, 이 사람 개인정보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어떻게 알아요? 

당신은 그 사람 몰라요. 그 사람이 날 해칠 지 보호할 지 몰라요. 모른다고요. 

낯선 타인과 근거리에 있게 될 때의 행동 원칙은, 분명해야 합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경계하세요. 늦은 시간에는 더욱 그렇고, 내가 술을 마셨으면 더욱 그렇고, 갇힌 공간에선 더더욱.  

많은 남성들이 잘 모릅니다. 여성이 범죄에 노출될 확률이 더 높다는 걸 체감하기 힘들어요. 가로등 불빛 꺼진 밤길을 걷는 공포감을 모르죠. 성폭력, 성희롱의 경험을 겹겹이 겪고 어렵게 극복해온 히스토리를 잘 몰라요. 사람 빽빽한 대중교통 수단에 오르는 두려움을 몰라요. 공중화장실에서 이상한 장치가 없나 찜찜해하며 속옷을 내리는 스트레스를 모르죠. 자취한다고 했더니 태도 돌변하여 다가오는 남자들을 향한 공포감을 모르죠. 혼자 길을 걷는데 휘파람을 불고 이유없이 쌍욕을 듣는 기분을 몰라요. 

그런데, 낯선 사람들에게 일일이 굿 매너를 가르쳐가며 사람 만날 수는 없어요. 그래서, X님의 자기 기준이 중요합니다. 타인은 언제라도 나에게 실수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자책은 금물. 

많은 여성들이 손종과 순응을 미덕으로 알고 자라요. 그것이 성차별적 사회화의 결과죠. 대화하는 중에 NO라고 거절할 수 있는 여성들은 많지 않아요. 화가 나고 싫은 상황에도 어색하게 웃으면서 얼버무리기도 십상이에요. 상대가 나보다 권력 우위(연상/ 남자/ 선배/ 어른)에 있다고 가정할 수 있는 경우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분위기를 거스르지 않고, 애정을 갈구하는 사랑스러움으로, 밝은 미소로 사람을 대하는 스킬을 익히며, 여자아이들은 착한 아이를 연습하죠. 애교와 아름다움이 여성의 덕목이라 배우고 자라요. 자기주장보다 다른 사람들을 서포트하는 역할을 맡기 일쑤입니다.

이렇게 사회적으로 기대되는 역할을 반복하다 보면, NO라는 대답이 참 힘들거든요.

저 역시 내가 왜 내 생각과 다른 태도로 사람을 대하고, 이후에 후회하는지 몰랐죠.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면서도 진작에 도망치지 못하는지, 몰랐어요. 나를 목적적으로 대하는 사람들의 진의를 뒤늦게 알고, 공포와 혐오에 빠지기도 했어요. 

X님이 지금 새삼스럽게 심장이 두근두근 뛰고 공포를 느낀다면, 훌륭합니다. 적어도 과거의 저보다는 말이지요. 

NO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평소에 충분히 연습해두어야 합니다. 오늘 일을 가끔 떠올려보세요. 그 상황에 어떻게 했었어야 했나, 뭐라고 대답했었어야 했나 반복해보고, NO라고 말하는 타이밍을 시뮬레이션해보세요. 연습을 많이 해야 막상 상황이 닥쳤을 때, NO라고 거절할 수 있어요. 연습이 부족하다면, 또 자기도 모르게 대답을 흐리거나 긍정 아닌 긍정을 하는 실수를 할 수도 있어요.

물론, 그 선배는 나쁜 의도가 전혀 없었고, 뜻밖의 장소에서 너무나 귀여운 후배를 만나 기쁜 나머지 정말로 순수하게 차를 마시고 싶었을 수도 있어요. 뭐, 실제로 그것뿐이기도 했지만요. 

하지만, 차를 권하는 타이밍도 장소도 완전 나빴죠. 

앞으로는, X님도 그 선배도 대인 안전거리에 대해서 좀더 염두에 두면 좋겠네요. 그러면 괜찮을 거예요.











(*2015년 11월 26일 리라이팅함.)



덧글

  • ranigud 2009/11/28 08:25 #

    웃으면서 '싫~어~요~^ㅁ^' 라고 하면 웬간해선 다들 그 이후로 말 걸기 힘들어하던데요(...) 나만 그런가... ;;
    거절해야 할 때는 확실하게 해야죠.
  • 2009/12/01 17:14 #

    마음은 확실히 거절해야지! 하고 다짐해도, 정작 그러기에는 정말로 용기가 필요한 것 같아요. 평소에 마음 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많이 하면, 나중에 정말로 no 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 2009/12/28 01:34 # 비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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