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4th prescription_나는 모든 것을 다 주었는데 그는 내 방식의 사랑이 부담스러웠다고 했어요

Z님 :

(아래는 요약내용입니다.)

저는 그를 위해 이것저것 챙기는 것이 좋았고 재밌었어요. 그는 자존감이 낮아 늘 자신없어했고, 제가 떠나갈까봐 두렵다고도 했죠. 그러나, 그는 속도 깊고 매력적인 남자였어요. 단지 저보다 나이가 어릴 뿐이었죠. 우리는 몇번의 권태기도 슬기롭게 넘겼고 너무나 행복했어요. 그는 받기만 하는 자기 입장을 생각해달란 약속, 왜 안지키냐며 말했지만, 저는 늘 넘치도록 주고 또 주었어요.

시간이 흘렀고, 저는 일이 너무 힘들어 가끔 그에게 짜증도 냈어요. 그래도 그는 늘 한결같았고, 서로의 미래를 함께 꿈꾸기도 했죠. 그러다, 그는 점점 바빠졌고, 저는 투정을 부리게 되었어요. 자주 싸웠죠. 저는 헤어지잔 말도 많이 했고, 그는 돌아오는 저를 늘 받아주었어요. 그런데, 그는 너무나 효자였어요. 저보다 부모님이 우선이어서 저는 늘 뒷전이었죠. 저는 제 문제로 지쳐서 늘 그를 닥달했고, 그는 받아주다 도망가다 그랬어요. 지겨울 정도로 많이 싸웠어요. 그래도 또 늘 화해했죠. 

그러다 결국 매우 심하게 싸웠고, 그는 현실적으로 우리가 맞지 않는 점을 지적하더라구요. 저는 매달렸고 그는 독하게 도망갔어요. 그는 서로를 위해 헤어지자고 했어요. 저도 결국 포기했죠. 저는 내가 그에게 내 방식으로의 사랑만 강요했구나 깨달았어요. 하지만, 미련은 버려지지 않았고, 이별 후 한참 뒤 마지막 통화에서 그는 그동안 사랑한 것이 아니었고, 그저 나에게 맞추어주었다며 그것이 너무 피곤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는 제발 자기를 잊고 더 조건 좋은 사람 만나 결혼하라고 했어요. 자기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고 줄 것도 없다고. 

저는 처음 한 연애에 모든 것을 걸었고 아직 어린 남친은 그런 것들이 부담되었을 거에요. 저도 다 알아요. 하지만, 저는 그가 아무리 잔인하게 했어도, 제가 그를 사랑한 것만은 진짜라고 생각해요. 언젠가는 다시 연락해도 될까 생각도 합니다. 

 








Z님, 닥터 엘입니다.

물론, 연상연하 커플도 남자와 여자일 뿐이랍니다. 하지만, 사람은 그 나이가 되어야만 알 수 있는 경험의 절대치가 있답니다. 어떤 사람들은 또래보다 더 많은 경험을 하고 더 깊은 사고를 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딱 나이만큼만 깨닫고 나이만큼만 어른이 됩니다. 그리고, 나이만큼 성장하는 것도 사실은 쉬운 일도 아니랍니다. 평생 엄마아빠의 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도 숱하게 많고, 평생 어린아이처럼 성장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으니까요. 어른이 되는 것은 나이가 먹는다고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고, 돈도 벌고 집도 사고 차도 사고 번듯하게 살고 싶지만 댓가를 치르지 않고 저절로 그렇게 되는 일은 결코 없지요. 물론, 유복한 집안에서 사랑받는 아이로 자란다면, 생각보다 쉽게 원하는 것들을 얻기도 하죠. 그러나, 부자 부모를 만나는 행운은 90%의 청춘들에게는 꿈같은 얘기일 뿐이랍니다. 그래서, 스무살이 넘어 대학을 하고, 스물두엇에 군대를 가고 제대를 하고, 이십대 중반이면 세상을 내맘대로 살기는 힘들다는 것을 절감하는 것이 보통이죠. 서른이 넘어가면 학업 문제, 진로 문제에서 한번씩은 성공과 좌절을 맛본 후겠지요. 여전히 학업도 진로도 답이 안나오는 남자들은 서른이 넘어도 많아요. 우리나라는 학력 인플레는 심하고, 계층 이동은 힘든 사회니까요. 그러나, 사람의 본능은 사랑을 원하고 사랑이 필요하죠. Z님과 그와의 인연도 아름답게 꽃피었을 거에요. 그것은 언제까지라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죠. 그것만큼은 걱정마세요.

Z님의 남친은 어른스러우려고 노력했을 거에요. 그런데, 생각만큼 그렇게 되지 않아서 답답했을 거에요. 사람마다 인생의 출발선도 주어지는 자원도 다 다르죠. 은스푼을 물고 태어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젖동냥을 하며 살아남아야 하는 아이도 있어요. 그 사이의 스펙트럼은 천차만별이죠. 그 안에서 스스로에게 짐지우는 좌절감이나 성취감의 크기는 개인마다 달라요. 또한, 나이가 들어가며 연애를 감당하는 능력이 커지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그것 또한 환경에 좌우될 때가 많죠. 그저, 사랑해 사랑안해 만으로 시간이 다 지나가는 풋풋한 연애는 오래가지 않죠. 누구라도 오래 사랑하면, 싫어도 어른이 되어야만 하고 서로의 관계를 책임져야 하는 시간이 와요. 그 시점은 20대 중반이기도 하고, 30대 중반이기도 하죠. 사람마다 다 달라요. Z님의 남친은 어떤 위치까지 와 있었고, 어떤 짐을 짊어졌던 걸까요?

두 분은 충분히 노력한 것 같아요. Z님은 하루하루의 길을 살아나가는데 골몰하고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생각했을 거에요. 많은 여자들이 현실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그랬을 거에요. Z님의 남친은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을 거에요. 나이많은 여친보다 더 성장해야 한다는 조바심이 있었을 것이고, 그렇지 못한 스스로를 원망했을 거에요. 연애해서 행복한 시기는 어느새 지나갔을 테고, 책임감과 좌절감이 더 커지는 시기가 찾아왔을 거에요. 그러나, 지나간 시간을 부정할만큼의 용기도 없었을 거에요. 망설이는 사이, 두 분의 관계는 계속해서 이어졌을 테고, 남친의 내면에서는 갈등이 커져갔겠지요.

Z님, 그가 헤어지고 나서 모진 말을 한 것은 기억하지 않으셔도 되어요. 그도 지나면 그러한 과정 또한 사랑이었음을 알 테니까요. 그러나, 사람은 누구라도 자신을 위해서 사랑하게 되어요. 사랑을 퍼주는 것도 내가 행복해서 그렇게 하는 거죠. 사랑을 받는 것도 내가 행복해야 받을 수 있어요. 그런데, 제가 연애를 해보니, 그렇더라구요. 똑같은 애정표현이고 똑같은 상황인데, 어떤 사람은 사랑에서 사랑만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사랑에서 부담을 먼저 느끼더라구요. 그것은 어떤 차이일까요?

저는 그것이 사랑받는 능력의 차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사람은 사랑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행복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누릴 줄 알아요. 부담 느끼지 않고, 죄책감 느끼지 않고, 사랑받는 만큼 사랑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사랑받는 것이 불안하고, 부담스럽고, 어떻게 누려야 할 지 몰라요. 항상 받는 만큼 돌려주어야 하는데 능력이 모자란다고 자기를 탓해요.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면, 결국 사랑을 하는 능력도 사랑을 받는 능력도,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자기애가 크고, 자기 긍정이 강한 사람은, 타인의 사랑에도 그만큼 긍정적이에요. 타인의 사랑을 자신의 에너지로 받아들일 수 있죠. 그런데, 자존감이 낮고, 자기 긍정이 서툰 사람은, 타인의 사랑이 마냥 편하지만은 않아요. 호의와 애정에는 목적이 있다고 생각하고, 의도와 크기를 따져 대처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죠. 그저 감사를 표하고, 기뻐하고, 그만큼 자신의 삶을 더 잘 살아내면 되는 것인데, 그게 되지 않는 거에요.

이러한 차이는 (또 프로이트를 들먹여 식상하지만) 어린 시절의 경험에 많이 좌우되는 것 같아요. 아시다시피, 성격은 잘 변하지 않죠. 사랑받는 능력도 그런 것 같아요. 사랑받아서 행복한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고, 그런 것 같아요.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고, 말을 못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래서, 두 분은 어딘가에서 길이 엇갈리기 시작한 거에요. Z님은 주는 것만을 생각했고,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는 살펴볼 여력이 없었거든요.

두 분은 사랑했고, 길고 긴 여정을 지나왔어요. 많이 싸웠고, 위기를 극복했고, 결국 모든 에너지가 다해 끝을 맺었죠. 소통은 했지만, 서툰 소통의 방법은 자주 전쟁을 불러왔어요. Z님은 상대의 말을 듣는 법과 마음을 읽는 법을 연습하지 못했고, 그래서 점점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게 되었던 것 같아요. 그가 끝을 선언하기 전까지에도, 두 사람이 진심을 말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들은 여러 번 발견되었을 거에요. 느닷없는 이별은 결코 없거든요. 균열과 엇갈림은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지만, 두 사람의 열정이 그것을 무시한 채로 관계를 어렵게 끌어오고 있었을 수도 있어요.

물론, 타인과 타인은 서로 다른 언어로 만나게 되어요. 연애라는 것은 서로의 언어를 배워가는 과정이죠. 시간이 갈수록 더 익숙해지고 더 재밌어지고 더 깊어지는 것이 바람직한 관계에요. 그런데, 두 분의 연애는 서로를 배울 시간이 부족했던 것 같아요.

Z님.

관계를 돌아보고, 사랑의 방식들에 대해서 공부하도록 해보세요. 누구라도 첫 연애에서는 많은 것을 잃어야 하고, 거대한 상처와 상실을 맞이해야 해요. 이 시간을 담담하게 감내하다보면, Z님에게는 더 큰 사랑이, 더 큰 인연이, 더 큰 행복이 찾아오게 되지요. 지나간 시간을 빨리 뒤로뒤로 흘려보내세요. Z님은 과거의 자신이 아닌, 좀더 성숙한 여자의 눈으로 그 시간들을 정리해야 해요. 준비하는 자에게 기회가 오는 법이지요.

두 분의 긴긴 시간. 언젠가는 보석같은 추억만 남기를 바라겠습니다.














덧글

  • 루얼 2010/04/17 14:26 #

    이번 상담 내용은 저한테도 도움이 많이 되었어요.
    이 글은 두고두고 읽어도 좋을 것 같네요.
  • 2010/04/25 03:40 #

    ^ㅅ^ 고맙습니다!
  • 2010/04/25 03:40 # 비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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