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0th prescription_꿈에 그리던 대학생이 되었지만, 여전히 갈 곳을 모르겠습니다

H님 :

(아래는 요약내용입니다.)

대학에 입학만 하면 좋을 줄 알았는데, 대학은 제가 생각했던 곳이 아니었죠. 경쟁은 여전했고, 인간관계는 어렵고, 수업은 여전히 주입식이었어요. 누군가와 친해지고 싶어도, 각자의 세계가 있는 것 같고, 여러가지 활동을 하고 싶어도 기회는 적어요. 의욕도 꿈도 목적도 없는 일상에 지쳐가요.

자존감이 중요하다는 걸 알지만, 저는 스스로가 한심하기만 해요. 이 막막한 심정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H님, 닥터엘입니다.

대학은 연애의 장도 아니고, 지성을 추구하는 아카데미도 아니고, 어른스런 인간관계가 주어지는 사교의 장소도 아니죠. 반면에, 대학생은 공부도 할 수 있고, 연애도 할 수 있고, 내 마음에 드는 친구를 사귈 수도 있어요. 대학이라는 곳은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모든 것을 하지 않을 수 있는 곳이에요. 아니, 어른이 된다는 것이 그런 것이죠. 뭐든지 해도 되고, 뭐든지 하지 않아도 되어요. 내가 무엇을 하든, 무엇을 하지 않든, 잘 하든, 못 하든, 대충 살아도 인생은 살아져요. 당장의 현실에 만족하기만 하면, 누가 당장 엉덩이를 걷어차는 것도 아니죠. 대단한 무엇을 하지 않아도, H님은 당장 굶어죽지도 않고, 당장 갈 곳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당장 연락할 곳이 막막한 것도 아니에요.

왜냐하면, H님은 아직은 정말로 어른이 아니기 때문이죠. 아직은 친구들이 있고, 실수가 용납되고, 방황조차도 특권인 대학생이기 때문이에요. 답은 어디에나 있고, 정답은 없어요. 이러한 사정은 H님이 대학생이어도 사회인이 되어도 결혼을 해서 엄마가 되어도 마찬가지에요. 인생의 답은 어디에나 흔하게 널려있어요. 길거리에 아주 발에 채일 정도로 여기저기 굴러다니죠. 책을 펼쳐도, TV 광고 속에서, 우연히 길에서 마주치는 아줌마들의 수다 속에도, 인생의 답이 있어요. 그러나, H님이 그 중에서 어떤 것을 골라서 내 것이다, 선언하지 않으면 삶은 언제까지나 미완성이고 미궁이고 막막한 거에요. H님만 이렇게 길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이 자신의 길을 선택하기 전에는 길을 알지 못하죠. 그러니까, 정신을 차리고 생각해봐요. 내가 진정으로 고민하는 것은 무엇인가?

저는 대학생일 때에 해야 할 일이, 실수하고 또 실수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것도 하지 않으면 크게 손해 볼 일은 없죠. 그러나, 도전하고 실패하고, 선택하고 책임지는 일을 연습하지 않으면, H님의 고민은 시간이 흘러도 똑 같은 자리를 맴돌게 되어요. 당장 내가 해야 할 일을 모른다면, 옆 사람을 흉내내는 것으로 시작해도 되어요. 일단은 무엇이라도 선택해보세요. 가난해서 못하고, 잘 몰라서 못하고, 혼자라서 못한다고 투정부리다 보면,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아요. 물론,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선택한다면, 그것이 H님의 인생에서 또 다른 의미를 찾아줄 수도 있죠. 하지만, 되도록 많은 경험과 사유와 깊이를 선물해주는 것은, 선택하는 삶이죠. H님은 상처와 고난의 역사를 가득 가진 할머니가 되고 싶나요, 상처를 피하기 위해 어떤 길도 가보지 않은 할머니가 되고 싶나요?

대학이라는 것은 그저 상징이고 이미지일 뿐이에요. 대학이라는 것이 대단한 의미와 목표를 그저 심어주는 것은 아니죠. 대학은 그저 내 삶에서 매일 주어지는 하루하루의 시간일 뿐이에요. 막막하다면, 가능한 자원과 인맥을 다 동원해서 정보를 모으고 상담할 사람을 찾고 자료를 뒤지고 시행착오를 겪어봐야 하죠. 내가 이곳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확인하고 움직여야 하죠. 나의 소심하고 섬세한 성격과 취향에 부합하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는 정말로 쓸데없는 인간관계를 몇번이나 만들고 버려야만 하죠. 어떤 사람이 나를 진심으로 바라보도록 만들려면, 그 사람에게 최선을 다해 말을 걸어야 해요. 부탁도 해보고 거절도 당해보아야 하죠.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이용만 당하거나 이용만 하려는 사람도 있죠. 내가 누군가에게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 생각도 해야만 해요. 언제나 진솔하려고 용기 내면, 언젠가는 내 진심을 알아주는 사람도 만나게 되는 법이죠.

대학은 내가 사용하기에 따라서, 단지 직업알선소가 될 수도 있고, 사교의 장이 될 수도 있고, 미래를 위한 인생의 휴식처가 될 수도 있어요. 여행지가 될 수도 있고, 스펙을 위한 학원이 될 수도 있고, 알바를 위한 라이선스 발급처가 될 수도 있죠. 마음의 고향이 될 수도 있고, 영영 생각하기 싫은 간이휴게소가 될 수도 있어요. 저에게 대학은 상처와 피곤과 채무를 안겨준 곳이었죠. 또한, 게임의 법칙과 방황할 사치를 준 곳이기도 했어요. 하지만, 저의 동창생 중에는 대학을 통해 결혼과 직장과 근사한 인적 네트워크를 얻은 사람도 있어요. H님이 대학생이 되어 어디서 무엇을 하든, 각자의 몫이라는 뜻이에요.

젊은 날은 내가 무엇을 모르는 지조차 모르기 때문에 막막할 수 밖에 없어요. 그러나, 고민하는 만큼 얻게 될 것이에요. 자존감이 낮은 것은 문제가 될 수도 있지만, 오히려 스스로를 자극하는 지렛대가 될 수도 있죠. 지금 H님이 아무 것도 아니고 어디로도 갈 수 없는 것을 한탄하지 마세요. 한숨 쉬는 것을 멈추고, 오늘 하루를 무엇으로 채울 지부터 생각해보세요.

우선 한걸음을 떼어보는 일. 그것으로도 변화는 시작될 거에요. 용기 내시기 바래요.









덧글

  • ranigud 2010/06/08 22:52 #

    현재 우리나라의 대학은.... 작은 사회...랄까요. 피튀기는 실제사회에 대한 튜토리얼... 이랄까요... 뭐 그런겁니다. 그래서 반수하는 사람도 많고 저같이 멀쩡한 대학 다 졸업해서 다시 원하는 공부 하려고 다른 대학을 또 들어가는 사람도 있는거죠.
  • 2010/06/09 17:22 #

    우리나라는 학력 인플레가 너무 심하죠. 4년제 나와도 석사 해야 하고 또 박사 해야 하고 유학도 가야 하고 자격증도 따야 하고. 끝이 없죠. 졸업해서도 다른 분야를 도전하고 싶다면, 또 대학원 가야 하고요. 저도 공부하고 싶은 게 생겼지만 돈이 없어서 공부 못하고. 뭘 하려고 해도 아직 학자금 대출은 끝이 안났고. 흐흐흐흐흐.
  • ranigud 2010/06/08 23:01 #

    여러가지 활동을 하고 싶어도 기회도 적고 시간도 없죠. 전 결국 졸업할때까지 동아리활동 한번 못해봤어요. 엠티도 안갔죠. 다들 각자의 세계가 있는 것처럼 본인도 자신의 세계가 있잖아요. 모두 같은 고민을 할거에요. 부모님들이나 어른들은 대학만 가면 좋다고 '환상'을 심어주죠. 대학에만 가면 아르바이트도 하고 연애도 하고 살도 빠지고 모든게 술술 풀릴 것처럼. 아, 실제로 부모님 세대가 대학을 다닐 때는 정말로 대학에만 가면 모든 게 술술 풀렸습니다. 과외만 해도 그 돈으로 충분히 대학을 다닐 수 있었더랬죠. 지금은 전혀 아니구요. 그러니까 평범한 학생들이 대학에 가서 좌절을 하죠.
    대부분의 학생들이 졸업하고 나는 뭔가 해야겠다, 라는 생각보다는 그냥 성적에 맞춰서 적당히 좋아보이는 대학과 적당해보이는 학과에 지원해서 가니까 의욕도 꿈도 목적도 다 잃어버리게되죠. 대학에서는 수업은 당연히 주입식일 수 밖에 없구요.(그 많은 지식과 학문을 참여형이나 토론형으로 했다가는 언제 졸업하게 될 지 모릅니다;; 그런건 대학원에 가서......) 대학이후에 확고하게 평생 내가 뭘 하고 살아야 할지를 생각해보시는 게 좋아요.
  • 2010/06/09 17:23 #

    널널한 학교도 있고 미칠 듯이 빡쎈 학교도 있고. 학부는 널널한데 학원에서 빡쎄지는 학교가 있고, 학부도 학원도 그저 돈만 내면 졸업하는 데도 있고. 그런 거죠. 잘 알아보고 댕겨야 해요.
  • 구레 2010/06/09 08:50 #

    이런 말들, 조언들 소중한 말입니다. 저도 졸업을 앞두고 보니 나름 여기저기 많이 굴렀다(;)고 생각 하는데도 아쉬운게 많아요. 선배다 언니다 오빠다 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이런 고민들에 나를 움직일 말을 해주는 사람은 잘 없죠. 그런 의미에서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 2010/06/09 17:24 #

    덧글 감사합니다! 학교라는 건 본인이 하기 나름인거 같아요. 아는 만큼 활용이 가능하죠.
  • 객客 2010/06/09 13:09 #

    남자라면 군대가 제대로 사회화의 시작이겠지만, 군대 안 가는 사람에겐 대학부터가 사회화의 본격적인 시작이라고 할수 있죠. 술문화부터 시작해서 우루루 몰려다니는 거 같지만 한꺼풀 벗겨보면 또 그게 아닌 교우관계 선후배관계, 반강제같지만 무시하면 그만인 학생회 행사(물론 그 나름대로의 대가는 분명 있지만)등. 조별과제? 보면 개중엔 하는 사람만 하고 안하는 사람은 손도 안댑니다. 보고서? 원본 하나 완성되면 그다음엔 서로 베끼게 돼 있습니다. 레포트도 그렇죠. 시험기간에 족보 돌아다니고 수업 잘 출석도 안 한 애들이 정리된 노트 다 들고다닙니다. 어디서 구했을까요? 자발적인 의욕을 불태워 공부하는 사람 흔치 않습니다. 다 해야 되니까 하는 것일 뿐이고, 그래서 자의로 열심히 한다기보단 정보전과 눈치싸움이 치열해지죠.
    그런 상황에서 의미있는 무언가를 원하신다면, 스스로 의미있다는 생각이 드는 일이나 관계를 찾으시길 권합니다. 과 안의 인간관계가 도저히 소원한 상태를 개선하기 힘들거 같거나 1,2학년 성적을 어느 정도 양보해도 괜찮다 싶으면 동아리활동도 좋죠. 아무래도 취미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이면 말도 잘 통하고 정신세계에도 공통분모가 커지니까요. 제 경우 1학년때부터 과에선 아웃사이더였지만 동아리엔 목숨걸었더니 4학년때까지 두고두고 흉금을 터놓는 친구들 몇명은 확실해 생겼습니다.
  • 2010/06/09 17:27 #

    요새 레포트는 검색하고 적당히 짜집기해서 쓴다면서요. 기겁했어요. 학생들은 선배들이 그렇게 하니까 따라한다 쳐도 그걸 못 알아보고 점수 주는 교수들도 문제 있다 생각함. 제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안 그랬는데, 세월이 많이 흐르긴 흘렀나봐요. 정말로 요즘 대학은 취업대비반인 듯.
  • byeonej 2010/06/10 23:05 #

    상담글 요청했던 사람입니다. 좋은 답변 정말 감사드려요.
    늘 짓눌려있던 고민이라 숨막히고 답답하기만 했는데 이렇게 따뜻하고도
    명확한 상담을 듣고 나니까 힘이 나는 기분이에요. 코멘트 달아 주신 분들도
    모두 감사하구요. 열심히 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엘님, 앞으로도 종종 상담 부탁 드려도 되겠죠?
  • 2010/06/11 10:50 #

    졸업하면 더 막막하답니다. 사실... 인생은 평생 답 찾으며 걸어가는 길이지요. 남들 기준 대로 시키는 대로 살겠다 다짐하면 고민이 없을 수는 있어요. 하지만, 고민하기 시작했다면 되도록 나만의 정답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화이팅입니다!!!!!!!!!!!!!!!!!!!!!!
  • 팡야러브 2010/06/12 10:37 #

    저희 학교는 족보는 커녕 레포트 서로서로 안보여줄려고 하고 참여형, 토론형 수업을 한학기에 몇번씩은 꼭 하고 과의 명수는 20명이라 1~4학년까지 서로들 전부 알고 모든 행사는 강제 참석이에요 ㅇㅅㅇ ㅋㅋ
    제일 문제는 고등학교때 어른들이 대학만 가면 끝난다고 하는 말들입니다... 대학이 수단이 되어야지 목적이 되었다가는 그 즉시 멍~해지죠.. 1위만을 목표로한 가수나 올림픽 금메달을 인생의 목표로한 김연아 선수나 무릎팍도사에 나와서도 그러더라구요 ㅎㅎ 1위는 거쳐가는 것이어야 된다는..
  • 2010/06/13 01:22 #

    족보 돌고 레포트 베끼는 것이 보통스럽게 느껴진다면 큰일이지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학교에서 아무리 1등 하고 칭찬 받아도, 사회에서 생존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라는 거. 에잉. 돈벌어 먹고 사는 거 힘들어요.
  • ranigud 2010/06/13 21:29 #

    역시 학과나 학교마다 다른가봐요. 전 한 학년 30명이었는데 그나마도 2학년 들어가면서 물리/생물/화학으로 갈라지면서 별로 보지도 못했고 1학년때도 행사는 다들 어떻게든 빠지려고 했었더랬죠...; 행사에서 얻어지는 게 없었기 떄문에...; 물리다보니까 참여형 토론형수업은 불가능.......;
  • 2010/06/14 18:35 #

    제가 참석했던 행사에서 얻었던 것은 오로지 술 마시는 분위기 적응과 알콜성 간질환의 폐해. 술마시고 개되는 인간유형 관찰... -ㅅ-

    대학마다 다르고 세대마다 다르겠지요. 다르겠다고 믿고 싶어요.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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