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6th prescription_시들해지다 결국 헤어졌는데, 인생의 갈 곳을 모르겠습니다

I님 :

(아래는 요약내용입니다.)

연애의 초기가 지난 후 그는 제가 늘 뒷전이었죠. 저는 자주 울고 투정부렸어요. 그는 제가 힘들어도 내버려두기도 했었죠. 결국 그는 저를 더 좋아하고 잘 해주는 것은 무리라며 헤어지자고 했어요. 저는 이별을 맞이하고 돌아본 제 삶이 엉망이 된 걸 깨달았습니다. 일도 관두었고 인간관계도 없어졌죠. 돈도 없고 갈 곳도 몰라요. 저는 남친 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남친이 없으면 저는 아무 것도 아닌 백수입니다. 세상에서 저 혼자 밖에 없는 것이 너무나 무섭습니다.

저는 매달렸어요. 그는 도와줄 수 있는 건 도와주겠다 했지만, 마음을 돌리진 않았죠. 도대체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어요. 정말로 답이 없다면 죽어버릴 지도 몰라요.










I님, 닥터엘입니다.

제가 보는 그 친구는 그다지 훌륭하고 멋진 연애상대는 아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연애가 언제나 후순위였고, 성의 없었고, 이별의 책임을 상대에게 돌리는 센스도 지녔죠. 단 한가지 제가 발견한 그의 장점이 있다면, 더 늦기 전에 이별을 선언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I님은 제 말이 섭섭할 지 몰라도, 이 연애의 이별은 마땅하고 값어치있고 좋은 일입니다. I님에게는 더욱 그래요.

I님은 연애가 자신의 삶을 구원하리라 막연히 상상하고 있었죠. 그러나, 연애는 인생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가족이? 신이? 친구가 구원하는 것도 아니에요. 내 삶을 구원할 유일한 존재는 나 자신 뿐입니다. 삶이 무겁고 어렵고 힘들어도, 내 삶의 주인공은 I님 뿐이죠. 어떤 전설적인 연애를 하고 기가 막힌 사랑을 한다 해도, 그것이 인생을 구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물며, 시들시들하고 자존감 낮춰가며 매달리고 내가 언제나 뒷전이었던 그 남자와 하는 연애가 I님의 삶을 구원할 리 만무하잖아요. 아주 상식적인 결론이지요. 뻔한 답이고요. 삶을 구원하는 것은, 언제나 I님이랍니다. I님이 지금부터 다시 살아보겠다 결심하면, 그 때부터 작은 변화가 생기는 것입니다. I님이 자신의 단칸방에서 이제 내가 나를 돕겠다고 다짐한다면, 그 때부터 I님 안의 거인이 깨어나오는 거에요. 스스로 걷기 시작하고, 어디로 가야할 지 결정하게 되고, 문제에 부딪히면 어떻게 해결해야 할 지 방법을 찾기 시작하는 거죠. 어른이 되는 거죠. 무력하게 주저앉아 아무 것도 모르겠다고 앙앙 우는 대신, 눈을 뜨는 거에요. 아직도 수백번, 수천번 다시 찾아올 아침을 위해서 다시 시작하는 거에요. 맨손으로, 혼자의 힘으로, 길을 찾아서 일어서는 거에요.

I님의 무력감은 연애 때문에 온 것이 아니에요. 어렸을 때는 막연하게 생각하죠.

스무살이 되면 정말 멋질 것 같아. 어른이 되면 내가 더 능력 있어지겠지. 스물다섯이 되면 하이힐과 비즈니스 수트가 잘 어울리는 커리어우먼이 될 거야. 서른이 되면 뭐든지 척척 해결할 수 있겠지. 더 안정되고 여유가 생길 거야. 마흔이 되면 나는 남편과 아이들과 행복한 가정을 꾸릴 거야. 쉰이 되면 해외여행도 다니고 문화생활도 즐기고 여유로워지겠지.

보통스러운 삶은 보통 이런 것이겠죠. 하지만, 보통스러운 삶 또한 치열하게 투쟁하고 싸워야만 겨우겨우 얻을 수 있는 삶도 많고 많아요. 피투성이가 되어서야 겨우 단칸방의 월세를 내고, 십년이 넘도록 바둥거려야 겨우 학교를 졸업할 수 있고, 생활은 커녕 생존에만 급급해서 청춘을 다 보냈는데도 막상 서른이 되어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기도 하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홈웨어를 걸친 채로 아무렇지도 않게 마트에서 장을 보는 보통스러운 삶조차도 신기루처럼 멀게 느껴질 지도 몰라요. 가족이 없고, 능력이 없고, 친구가 없고, 사람이 없는 삶은 갈 곳을 모르게 만들죠. 꿈은 크게 꾸어야 한다는 충고가 헛웃음이 나오고, 나에게 꿈이란 게 있었는지조차 가물거릴 거에요. 애써도 안된다는 교훈에 길들여져서, 포기하고 싶은 날이 더 많을 지도 몰라요. 주변을 둘러보아도 성공한 삶보다 실패한 삶이 더 많은 환경에서는, 무엇을 꿈꾸어야 할 지조차 막연하고 막막하죠. 그럴 때는 자신을 존중하고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말도 비웃고 싶어질 만큼 마음은 텅 비죠. 하루가 지나는 것이 칼날 위 같고, 우주 미아가 되어서 밤새 쫒기는 꿈을 꿀 지도 몰라요. 하지만…

내 삶이 아무리 제대로 누울 수 조차 없는 좁고 낡은 단칸방에 있어도,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삶은 귀한 선물이에요. 아무리 비천하고 가난한 삶도 내 몸이 아프지 않고, 여전히 사랑을 욕망하고, 스스로를 도울 두 손이 있고, 아픈 가족이 주렁주렁 매달려있지 않다는 것은 감사할 일이고 대단한 일이에요. 당장은 고픈 배를 채울 돈이 있고, 배우고 싶은 것이 있고, 진로며 장래며 고민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여유죠. 나의 외모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실망하며 몸무게를 줄이는 방법을 심사숙고하는 것도 스스로에 대한 애정이 여전히 활활 타오른다는 증거고요. I님이 아무리 싫다고 해도, 내일은 또 오지요. 또 24시간의 하루가 주어지고요. 자원과 능력과 노력이 한없이 부족하다고 해도,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무슨 짓을 하더라도, 시간만큼은 제멋대로 잘도 흘러갈 거에요. 또 하루 나이가 먹는 것이고, 경험이 쌓이는 거죠. 한숨을 쉬고 포기한다면 포기하는 하루의 경험이 쌓이고, 울면서 자포자기하면 좌절하는 하루의 경험이 쌓일 거에요. 물론, 다른 방법도 있죠. 더 좋은 것, 더 나은 것을 열심히 욕망하면서, 나와 나의 삶을 바꿀 수 있는 원대하고 길고 긴 계획을 시험삼아 하루치만큼만 시도해보는 거에요. 잘 될 수도 있고, 금방 지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어쩌면 생각보다 기운이 날 수도 있고, 작심삼일이 되었어도 일주일 뒤에는 다시 도전해볼 마음이 될 수도 있어요. 그래도 정말로 좋은 점 하나는 있죠. 세상 모두가 I님의 존재를 모르고 인정하지 않는다 해도, I님은 스스로를 잘 알잖아요. 모자라고 나약하고 위로가 필요하고 좋은 것을 먼저 선택하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얼마든지 연민을 가져도 되어요. 용기를 주어도 되어요. 무엇보다 기회만큼은 백번이고 천번이고 줄 수 있죠. 이것이 I님의 삶에서, 그리고 누구의 삶에서도 공통되는 권리로서도, 살아있기만 하다면 누릴 수 있는 제일 좋은 점이에요. 잘 못해도 막막해도 그저 다시 한번만 기회를 주세요. 스스로에게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세요. 더 좋은 목표를 가질 수 있도록 격려를 해주세요. 실패해도 되어요. 더 나이가 먹어도 상관없어요. 자신에게 다시 기회를 주는 관대함만 가진다면, 결국 그 삶은 구원받을 수 있어요.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의 힘으로 말이에요.

I님. 이 말들은 I님에게만 드리는 말은 아니에요. 저 자신에게 하루에도 몇번씩 되뇌이는 말이에요. 저도 남들처럼 보통스럽게 살고 싶었어요. 꿈을 꾸고 싶었죠. 어렸을 때는 가난한 환경과 가족을 탓했어요. 의지박약의 스스로를 탓하고 연약한 체력을 탓하고 부모님을 탓했죠. 그런데, 그러는 사이에도 저는 차곡차곡 나이를 먹더라고요. 더 이상 자라온 배경과 조건을 탓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보통스럽게 사는 삶은 많이 늦었더라고요. 하지만,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어요. 삶을 접을 만한 용기도 없었거든요. 이래도 저래도 삶은 살아져요. 당장 죽지는 않아요. 그러니까, 다시 한번 자신에게 기회를 주세요. I님은 저보다는 너무나 어리죠. 더 많은 기회와 선택이 있어요. 자존감이 낮아졌다고 한탄할만한 인식도 있죠. 저는 스스로를 자학하는 이유조차도 몰랐어요. 자존감이라는 단어가 있는 지도 몰랐죠.

I님. 그 연애는 아주 짧았어요. 긴긴 I님의 인생에서 보면 무시해도 좋을만한 시간이었어요. 그리고, I님이 그리워하는 그 남자는 I님에게 반하지도 않았고, I님이 우선순위이지도 않았죠. 그런데 왜 그런 남자에게 매달리며 시간낭비를 해야할까요? 만약 I님이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않는다면, 더욱 그런 연애에 연연하면 안되는 거에요. 지금은 더 좋은 것들로만 채워도 부족하잖아요. 더 좋은 연애상대, 더 좋은 사랑을 꿈꾸어도 I님의 외로움이 보상받을까 말까라고요.

사람이 없다고요? 기회가 없다고요? 그렇다고 그저 낡아버린 그 관계에 매달릴 건가요? 더 좋은 답을 궁리해보세요. 산책을 나가요. 돈을 더 벌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보아요. 운동을 하자고 마음 먹어요. 필요한 정보를 찾아서 도서관에 가세요. 살아온 삶의 흔적이 그대로 남은 스스로의 몸을 차근차근 관찰해보세요. 아직도 귀여운 어딘가를 찾아서 충분히 칭찬해주어요. 나의 장점들을 필사적으로 생각해서 노트에 적어보세요. 혼자 있어도 우아를 떨며 정성스럽게 우려낸 차를 마시세요. 소설책도 읽고, 자기계발서도 읽고, 가끔은 패션 잡지도 뒤적여보세요. 학교로 돌아가고, 나보다 더 고민하는 사람들은 없을까 둘러보세요. 길에서 버스에서 눈이 마주치는 낯선 타인에게 미소를 지어보세요. 갈 데가 없어도 가끔은 차려입어요. 청소를 하고, 일기를 쓰고, 걸레가 깨끗해질 때까지 박박 문질러 빨아보세요. I님이 할 수 있는 일은 많고도 많아요. 내가 바쁘고 힘차게 살아가면, 또 인연은 오죠. 훨씬 더 건강하고 아름답고 제대로 된 인연이 말이에요.

당장의 외로움에 지지 마세요. 자신에게 기회를 주세요. 분명히 더 성장할 수 있고, 변화할 수 있어요. 스스로를 믿으세요. 그러면, 느리지만 분명하게 I님은 더 행복해질 수 있어요.

울지 말고, 일어서시기 바래요. 용기 5cc 추가 처방합니다.









덧글

  • 2010/06/26 20:49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0/06/26 22:46 #

    저도 똑같았던 과거가 있으니까. 제가 딴 건 몰라도 자기 연민만큼은 충만하거든요. 다들 그런 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에서 젤 힘들고 불쌍한 건 자기자신이잖아요? ㅠㅅㅠ 저도 더 힘내야겠어요! 얍얍!!!
  • 2010/06/26 22:43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0/06/26 22:45 #

    머리로는 알아도 몸을 움직이게 하는 건 힘들죠. 언제나 힘들어요. 그래도 포기할 순 없잖아요? 어떤 날은 징징 울면서 움직이기도 하죠. 결국은 움직이는 게 좋아요. 그러니까, 할 수 없어요. ㅠㅁ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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