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9th prescription_오래 전 친구가 제 부모님에 대해 말실수한 일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C님 :

그 친구는 개성이 강한 타잎이고 사람을 깊게 사귀는 타잎이라 저와 금방 친해졌죠. 제가 힘들 때 언니처럼 챙겨주기도 하는 애착 많은 친구였어요. 서로 다른 점이 있다면, 저는 가족을 소중하게 생각하는데, 그녀는 남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말실수를 많이 했어요. 저는 몇번은 그냥 넘어갔지만, 몇번은 그녀의 사과를 받아내기도 했죠. 다른 사람들의 말실수에는 엄격하면서 정작 본인이 말로 타인을 상처주는 것은 모르는 것 같았어요. 너무 가까운 친구라 저는 일일이 화를 내지도 못하고, 늘 참으면서 마음이 답답했어요. 그래서 어느날부터인가 연락을 하지 않게 되었어요.

지금은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 그녀 생각이 가끔 나요. 아마 그녀도 그럴 거에요. 그런데 그녀가 그리워서는 아니에요. 그녀가 저의 가족들에 대해서 말실수를 한 것들이 너무 상처가 되고 남는 거에요. 그 말은 들은 자리에서 바로 사과를 받아내지 못한 것도, 내 가족을 욕되게 한 것 같고요. 그런 마음들이 복합적으로 남아 저를 힘들게 해요.

어떤 책에 보면 참기 힘든 타인의 단점은 내가 갖고 있는 것이라서 그렇대요. 그 말이 맞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는 가족과 관련한 일이라면 예민해집니다. 


 








(위는 요약내용입니다.)


C님, 엘입니다.

저도 어디선가 봤어요. 타인을 비난하는 부분이 내 안에도 있어서 그렇다고. 그런데, 세상의 온갖 찌질하고 비열하고 더러운 것들도 다 내 안에 있는 건 당연한 거죠. 인간의 구성요소가 다들 비슷비슷하지 않겠어요. 그것의 비율이나 출력방법이 조금씩 다른 것 뿐이지. 약간씩 차이나는 그 부분들이 인격을 만드는 거고 개성을 만드는 거지요. 바닷물의 조성성분과 체액의 성분도 비슷하다고도 하잖아요. 세균과 인간의 DNA도 한끝차이라던가. 하물며 같은 인간인데 말이에요.

그런데, 사람이라서 같은 부분도 있는데, 사람이라서 다른 부분도 있는 거랍니다. 가치관과 기준이라는 것은 세상의 상식과는 무관할 수도 있어요. 그 사람이 살아온 세상의 정체는 정말로 깊이 상대를 겪기 전에는 알 수가 없죠. C님의 세상에서는 부모님과 자신의 연결이 무엇보다 소중해요. 부모님을 욕되게 하는 것은 자식된 도리가 아닌 것이고, 부모님은 존경과 사랑으로 모셔야 할 존재죠. 이것이 세상의 상식이고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약속이 지켜지는 세상에서 살 수 있다면 좋겠죠.

그런데, 막상 개인이 겪는 세상은 '상식이 상식이 아닌' 세상일 확률이 훨씬 커요. 부모가 나를 사랑하고 지키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나를 누르고 착취해요. 연인들이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하고 파괴하지 못해 안달이 나요. 사랑해서 아이를 낳는 것이 아니라, 목적이나 계약을 위해 아이를 낳아요. 어른이 되어 철이 드는 것이 아니라, 어른이 되어 폭력을 휘두르게 되어요. 조직의 대표가 대의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리사욕만 챙겨요. 세상에는 남자와 여자만 있는 게 아니라, 생물학적, 정신적으로 다양한 성이 존재해요. 기독교만 종교인 것이 아니라, 세상에는 다양한 종교가 있죠. 무시하려고 해도, 내가 아는 세상 바깥의 세상도 엄연하게 존재해요. 각자가 다른 세상에 사는데, 내가 아는 세상의 기준과 가치관으로 상대를 바라보면 힘들고 아프고 고통스럽죠.

다행스럽게도 서로의 공통분모가 많다면, 서로 덜 부딪힐 수 있죠. 그런데, 화장실 휴지 한칸만 해도, 어떤 사람에게는 죽도록 아껴야 하는 소중한 자원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한칸이나 스무칸이나 큰 문제가 아니죠. 어떤 사람은 숟가락 하나 더 꺼내는 것이 설겆이 거리를 늘리는 중차대한 일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숟가락 하나나 두개나 어차피 한번에 해치울 설겆이 거리라 큰 문제가 아니죠. 누가 맞고 누가 틀리나요? 그런 것은 없죠. 그저 서로 다를 뿐이에요.

친구는 아마도 별 생각이나 의도없이 C님을 위로하려다 오히려 화나게 했고, 별 의미없이 농담하다가 C님의 부모님을 모욕했죠. C님의 상처를 찔렀고, C님이 힘들다 울었고, C님에게서 멀어졌어요. 서로 맞지 않았던 거에요. 내 상식이 친구의 상식이라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어요. 친구이기 때문에 더 힘들고 싫고 화가 나죠. 연인이기 때문에, 가족이기 때문에, 나와 가깝다 생각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몰이해와 솔직함이 견디기 힘든 거에요.

하지만, 가까이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은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거에요. 가깝기 때문에 즐겁기도 했던 것처럼.

세상의 모든 상처에서 도망가는 방법은 없지요. 어쩔 수 없이 사람은 사람과 어울려 살아가니까요. 물론, 최대한 사람들의 그림자를 밟지 않도록 숨는 방법도 있어요. 그러나, 그런 삶은 외롭죠. 스스로를 좋아하기 힘들게 되죠.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얼마만큼의 크기인지 가늠할 수 없게 되니까요. 인간은 타인의 존재 때문에 자신을 인식할 수 있거든요. C님이 만약 우주 공간의 먼지라면, 자신이 그곳에 있다는 것조차 알 수가 없을 거에요. 그런데, C님은 관계 안에 있었기 때문에 화가 나고 억울해하고 원망하고 기억 때문에 고통스러워 하지요.

그녀는 분명히 C님에게 좋은 친구였어요. 그러나, 동시에 상처도 주는 사람이었죠. 그런데, 그가 C님의 부모님을 공격할 의도없이 모욕했다 해도, C님 부모님의 본질은 변하지 않아요. 그 분들은 실제적으로는 모욕당하지도 않았어요. C님이 지나보낸 과거의 기억이 다만 그런 불쾌한 잔상을 품고 있을 뿐이죠. 이미 지나간 시간이기 때문에, 마음을 다 풀지 못했고 그것이 만들어낸 악몽일 뿐이지요.

그녀는 C님이 관계 맺었고, 앞으로 관계 맺을 수많은 인연 중 극히 일부분이죠. 또한, 그녀가 C님에게 남긴 상처는, 그녀가 C님에게 주었던 온갖 좋고 나쁜 것들 중에서 아주 일부분이고요. C님이 해야 할 일은, 지나간 시간을 과거로 인정하고 새로운 관계를 구축하고 누리는 일이에요. 누가 나와 나의 가족에 대해서 무슨 평가를 하든, 무슨 공격을 하든, 그것은 C님과 C님의 가족이 가진 본질을 해치지는 않아요. C님이 구축한 세계를 흔들 수 있는 건,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 것도 없어요.

그러니, 기억 속의 그녀가 보여주었던 악의없는 실수를 너그럽게 용서하세요. 그녀가 한 말과 행동이 C님을 바꾼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걸 알고 안도하세요. 그리고, 그녀와 C님이 즐거웠던 기억 몇 가지만 간직하세요. 어떤 인연은 오래 가지만, 어떤 인연은 어떻게 끝났는지도 모르게 스쳐지나가 버리기도 하죠. 그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에요. 누구나 상대와의 관계를 등가로 기억하지는 않으니까요.

타인의 말이나 행동에 흔들리지 않는, 튼튼하고 강한 마음이 자라나도록 언제나 심호흡 크게 하시며 살아가시기를 빌어드릴게요.












덧글

  • 팡야러브 2011/07/02 18:41 #

    엘님 오랜만에 뵙네요 ㅎㅎ
    일단 아직까지도 연애를 못하고 있으니 엘님의 책도 연애 이전까지만 읽고 책꽂이에 꽂혀 있습니다 ~_~
    대망의 999번째!! 미리 일천번째를 축하드립니다 ^^
  • 2011/07/03 13:32 #

    ~ㅅ~ 안녕하세요. 책은 그냥 슝슝 읽어버리세요 ^^ 연애라는 것은 닥치면 또 전혀 다른 것이 되니까요. 미리 이런저런 생각들을 해보는 것은 연애든 진로든 인생이든 언제나 유효하지요.

    인구통계학적으로, 실제로 연애를 하는 인구는 많지 않다고 합니다. (어떤 기사인지는 까먹었는데) 그 중에서도 행복한 연애하는 인구는 얼마나 될까요?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세대를 3포 세대라고 한다던가. 제 주변에서도 3포 세력이 꽤 되는 데다가, 저 역시 결혼과 출산이라는 것이 엄두가 안나 고민 중이니, 이 사회는 뭔가 심각하게 잘못 되었죠. 연애는 그저 사람과 사람을 만나는 일인데, 그것을 강요하는 것도 그것을 포기하는 것도, 어느 쪽도 이상해요. 연애와 결혼이 생존이나 계층 유지의 수단, 혹은 능력의 과시가 되다니 슬픈 일이죠.

    팡야러브님은 자신의 신념을 공유할 수 있는 인연과 사랑하게 되시기를 빌게요.

    축하 고맙습니다!!!
  • 2011/07/03 00:10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1/07/03 13:49 #

    ^ㅅ^ 앞으로도 변함없이 계속되겠지요. (그래야만 해!!!) 하나하나의 고민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기 때문에 같은 값으로 의미있다 생각합니다. 앞으로 계속할 수 있는 힘이 생기도록, 노력해야할 텐데 아직은 어떤 길이 맞는 걸까 잘 모르겠습니다. ㅠㅅㅠ 그저 꼬물꼬물. 늘 하던 대로. 그러고 있네요. 이것도 문제 저것도 문제지만, 일단 할 수 있는 것부터 하자, 라는 소극적인 자세로, 끌어온게 1000회네요. 허허허. 닥터엘 연애상담소가 계속된다면, 사람들의 마음의 온도가 1도씨 정도 올라가지 않을까요. ^^ 그러면 세상은 더 따뜻해지겠죠. 라는 근거없는 희망으로 자가발전하고 있어요. 얍얍

    책은 말이에요. 참 좋은 책인데, 자꾸 뭘 배워라, 라고 하니 조금 부담스럽죠 ^^ 그저 그 책에 나온 것 중에서 하나라도 제대로 기억하고 마음에 담고 살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것 같아요. 자기계발서나 처세서 류가 유통되는 시장은 불안한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현 시스템을 공고화하는 중요한 산업이죠. 사실 심리학 이론이나 상식화된 심리학 용어도 결국에는 사회가 원활하게 돌아가게 하고 시장 기능을 활성화하는 뻔한 마케팅 용어라고도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책 하나하나에 담긴 진심 하나만 챙겨도 좋은 거죠. 그 산업 자체는 다들 먹고살기 위해 돌아가고는 있어도.

    바른 말 고운 말 쓰자, 는 유치원 때 다 배웠잖아요. ^ㅅ^ 근데 그게 안돼요. 가정에서부터 학교에서부터 폭력이 난무하니. 기득권은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불안을 조성하고 폭력을 쓰고, 그것이 정당화되는 논리는 수백가지죠. 원래가 약육강식이라느니, 국가경쟁력이니, 개인의 의지와 능력 부족이라느니. 어른들이, 더 큰 책임을 진 사람들이, 더 많이 가진 자들이 바른 말 고운 말, 예쁜 마음 가지고 살면, 아이들은 바른 말 고운 말 예쁜 마음으로 사는 게 옳다, 라고 알고 크겠지요. 그런데, 세상은 안 그래요. ㅠㅅㅠ

    아직도 예쁜 세상을 향한 꿈이 만발한 저를 두고 누군가는 착하다는 둥 순진하다는 둥 욕인지 칭찬인지 모를 말들을 하는데, 유치원 때 배웠던 것들을 지켜가고 싶은 마음이 그렇게나 촌스러운 걸까요.

    나이를 먹어도 아직도 세상에 적응이 안되는 걸 보면, 저는 참으로 지진아 인 것 같기도 합니다. 혹은 현실도피자. 그래도 먹고는 살아야겠고. 나쁜 어른들의 논리를 이용하여 생존하는 걸 보면, 세상은 딜레마의 연속인 것 같아요.

    좋은 사람들만 만나고 살면 참 좋겠어요. 그쵸? ^^

    축하감사합니다.
  • 2011/07/03 13:18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1/07/03 13:59 #

    비공개님. ^ㅅ^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그런데, 저도 타인의 말과 행동에 영향 받지 말라고는 말해도, 영향은 완전히 안 받기는 힘들죠. 그저 노력하는 거죠. 진실은 타인의 평가가 나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니까, 좀더 용기를 가질 수 있는 것 뿐이에요. 스스로를 믿는 것은 쉽지 않더라고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궁극적으로 나를 책임질 의무가 있는 것은, 오로지 나 자신이니까, 나를 지켜야 하니까, 나를 믿어야지요. 그러니까, 내 말이 최고! 다른 사람들의 말은 참고사항일 뿐.

    자신과 타인을 비교하는 일을 완전히 멈추는 일은 힘든 것 같아요. 상황이나 현실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나를 고통스럽게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것을 멈추기 위해서는 한번 생각해야 하죠. 모두 같은 기준으로 살지는 않아. 나를 몰아부치지 않아도 돼. 내 삶에서 내가 얻는 것이 더 가치 있어. 물질적인 것이 아니어도, 친구가 많지 않아도,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나는 내 길을 걸어갈 수 있어. 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일은, 정말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에요. 저 역시도 마음이 약해질 때가 아주 많고, 심지어 "내가 타인을 도왔듯이 나 자신을 돕자" 라고 생각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답니다.

    비공개님의 에너지를 나누어주세요. 저에게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괜찮아, 라고 말하는 일. 더 좋아질 수 있어, 같이 싸울 수 있어, 이해해, 같이 생각해보자, 나도 같이 고민해볼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볼게, 라고 말하는 일. 나도 똑같이 무서워, 나도 두려워, 나도 불안해, 하지만, 그대로도 괜찮아, 누구나 그래, 라고 말하는 일...

    솔직해지는 일이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가장 멋진 일이 될 수도 있는데, 다들 용기가 없지요.

    저는 비공개님의 성격 때문에 그러한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왜냐하면, 외부의 말이나 행동에 휩쓸리지 않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정도의 차이지! ^^ 겪기 전에는 기준이 잘 안 생겨요. 그러니까,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경험이 더 생긴다는 뜻이고, 비공개님이 더 어른이 되어갈 수 있다는 뜻이니, 차근차근 걸어가시면 다 좋아질 거에요. ^^

    덧글 남겨주셔서 저도 고맙습니다!!!!!
  • 유 리 2011/07/03 21:51 #

    으. 상담자 분과 같은 내용은 아니지만 비슷한 고민이 있어서 그런지 이번 상담이 무척 마음에 와닿네요.
    [이미 지나간 시간이기 때문에, 마음을 다 풀지 못했고 그것이 만들어낸 악몽일 뿐이지요.] <<정말 그래요. 이미 지나간 일이고, 그 자리에서 뭐라고 화를 내던가 반박을 하던가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고 지나가 버려서, 이젠 어쩔 수 없는데 마음은 여전히 상해있어서 계속 그 일이 상처가 되는. 예전에는 그런 기억들이 너무 많아서 머리가 터질 것처럼 괴로웠는데, 나이가 들고 이젠 그런 기억들도 더 이상 저를 상처 입히지 못하니, 시간이 약이라는 게 맞는 것 같기도 해요.
    그나저나 드디어 999번째 상담인가요! 999명 분의 고민들이 여기 있고 그 고민들에 대한 제안과 해답들도 여기 있는거네요. 대단해요. :)
  • 2011/07/04 08:54 #

    ^ㅁ^ 제가 봐도 대단해요! 하지만, 계속 지켜가고 변함없이 버티는 것이 관건이겠지요. 검색 기능이 좀 잘 되어서, 사람들이 1000개의 해답들을 더 잘 찾았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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