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3rd prescription_어디로 가야할 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습니다.

A님 :

제가 선택한 디자인 학과는 재미없지만 긴가민가해서 계속 대학을 다니고 있습니다. 전 아직 좋고 나쁜 것의 기준도 가리지 못할 정도고 동기들과 실력차는 점점 벌어지고 있습니다. 

디자인이 아닌 사무직으로 취업하려 보니 쟁쟁한 스펙들에 밀리고, 대기업 생산직을 알아보니 노동환경은 열악한데 연봉이 좋더라고요. 가까운 지인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더니 지금의 의욕없는 눈빛, 표정, 행동으로는 어딜 가도 무엇도 안된다고 쓴소리를 들었습니다. 

뭘 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되고 싶은 것도 없습니다. 인간관계도 시들합니다. 전 단순하게 살고 싶은데, 세상은 너무 복잡한 것 같습니다. 제가 너무 가치없는 인간인 것 같아서 괴롭습니다. 










(위는 요약내용입니다.)



A님, 엘입니다. 

별다른 생존의 고민 없이 여기까지 무사히 온 것에 대해 주변 사람들과 가족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먼저 가져보도록 합시다. 위기상황이 아니면 누구나 "나는 누구인가" 라는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려 하지 않죠. 절박하고 두렵고 막막할 때가 되어서야, 나는 누구이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답을 구하게 됩니다. 하루빨리 돈을 벌어야겠다거나, 원하는 뭔가가 죽도록 되고 싶다거나, 누군가를 반드시 구원해야겠다거나, 어딘가에서 탈출해야겠다거나... 이런 절박한 고민으로 고통받지 않았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도 알아두도록 합시다. 

내 환경, 내 가족, 내 친구에 대해서 감사한 마음을 가져보고 애정과 관심을 갖고 충분히 돌아봅시다. 그리고, 다음에 할 일은 자기 자신과 친해지는 일입니다. 

죽도록 애쓰지 않아도, 바둥거리지 않아도, 어딘지 모르고 걸어도 대충 살아졌잖아요. 이건 아니다. 그래요. 문득 눈을 떴다면, 그 때부터 시작하면 되는 겁니다. 누구나 어느날 뿅 하고 시작하는 겁니다. 눈을 뜨는 날이 너무 늦다거나 빠르다거나. 그렇게 정해진 건 없어요. A님이 오늘부터 다른 내가 되고 싶다, 라고 생각하면 그 날이 변화의 원년이 되는 겁니다. 괜찮아요. 대충 살아도 살아졌는데, 제대로 살자고 결심했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A님.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이게 정답인지 혼란스럽죠? 그러니까 자신과 친해져야 한답니다. 자신과 친해지는 일에는 굉장히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나의 몸을 가꾸고요. 나의 스타일을 가꾸고요. 나의 건강을 가꾸고요. 나의 가족과 친구들과의 관계를 가꾸고요. 내가 하루를 보내는 일상의 생활을 가꾸고요. 내가 무엇을 할 때 편안한지 즐거운지 행복한지 여러가지 것들을 하면서 찾아내고요. 나의 취미와 취향을 가꾸고요. 나만의 컬렉션을 만들어보고요. 일기든 사진이든 블로그든 나에 대한 지속적인 기록을 하고요. 내가 좋아하는 분야를 찾아서 도서관에 가보고요. 부러운 친구들을 관찰하여 보고요. 다양한 책을 읽고요. 자신이 지지할 수 있는 정당이나 대선후보가 누구인지 찾아보고요. 다양한 정치 칼럼을 읽어보고요. 지역사회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관심을 가져보고요. 가족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자신이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지 생각해보고요. 학내 행사에도 관심을 가져보고요. 교수님을 찾아가서 나 좀 도와달라 생떼도 써보고요. 좋아하는 작가를 찾아보고요. 전시회를 가보고요. 동호회에 가입하여 보고요. 상담실을 열번이고 백번이고 찾아가서 충분히 활용하여 보고요. 거주지의 구청이나 동사무소를 찾아서 봉사활동에 참여하여 보고요. 그렇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나가세요. 

깊이 들어가보지 않으면, 이것저것 시행착오를 하고 실패를 하지 않으면, 시간과 비용을 낭비하여 보지 않으면, A님은 결코 자신과 친해질 수 없어요. 사람의 내면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관심없는 것, 사랑하는 것, 증오하는 것, 추구하는 것 같은 욕구와 욕망의 방향성이 모여서 만들어집니다. 내면의 포트폴리오를 무엇으로 구성하는지는, A님의 선택이죠. 정답 같은 건 없습니다. 알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A님은 자신과 친해질 수 있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몰라도 괜찮습니다. 도서관에 가서 눈을 감고 서가의 통로를 걷다가 아무 책이나 뽑아들어서 읽는 주제부터 관심을 가져도 아무 문제 없습니다. 겁먹지 말고 두려워 말고 그저 선택하세요. 처음에는 선뜻 고르기 힘들지 몰라도, 무엇을 선택해도 나름의 답이 나온다는 걸 알면 점점 두려움은 작아집니다. 나중에는 선택의 기준도 생깁니다. 시간과 비용과 효율을 생각해서 고를 수 있게 되죠. 나다운 스타일이 만들어집니다. 내가 어떤 경향성을 가진 사람인지 점차 알게 됩니다. 내가 얼마나 연약한지 얼마나 대범한지도 알게 되죠. 자기 자신과 친해지는 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각오하고 용기를 내보세요. 

인생은 단순하게 살아도 괜찮습니다. 자신이 납득해서 선택한 방식이라면, 단순하지 않은 복잡한 것들을 다 무시할 배짱이 있다면 얼마든지 단순해도 행복합니다. 내가 원해서 선택한 것이 아니더라도, 내 앞의 우연을 사랑하고 애정을 갖고 들여다본다면 또다른 세계가 펼쳐집니다. 내 안의 조바심과 두려움과 어색함, 외로움, 비교비교 능력, 스트레스와도 친해지세요. 세상에 대한 온갖 부정적인 정보들, 타인이 나에게 무심코 던지는 평가의 말들, 너덜너덜해진 자존감에 겁먹지 마세요. 행복도 사랑도 자존감도 특정 조건이 충족되어야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행복해지자, 라는 선언에서, 나를 사랑하자, 라는 결심에서, 나는 귀한 사람이다, 라고 외치는 순간에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될 뿐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나요? 라는 질문이 떠오른다면. 그 방법은 각자가 찾을 바랍니다. 

예를 들어 저는 지금 11월이 시작되어 마음이 조금 쓸쓸하고 내 공간은 아무도 없이 키보드 소리만 들리고 오늘의 해야할 일은 줄줄이 밀려있지만, 행복하려고만 한다면야 얼마든지 그 근거를 찾아낼 수 있답니다. 쓸쓸하다는 건 감상적이 될 여유가 있다는 거니 행복하고, 아무도 없다는 건 상담에 집중할 환경이 되어 누군가를 도울 수 있으니 행복하고, 오늘의 할일이 있다는 건 심심하지 않을 거니까 행복한 거죠. 뭐, 다 귀찮다 싶으면 그냥 자리에 누워 쿨쿨 자버릴 수도 있고 어떤 문제도 저절로 해결되지 않지만, 내일 일은 내일 하면 되니까 괜찮은 거죠. 

내가 귀한 것은 A님이 태어나기 전부터 그냥 신이 그렇게 결정해 놓은 거니 근거도 이유도 없이 그냥 귀하다 생각하세요. 

그러니까, 귀하신 몸 A님이 오늘 어떤 행복을 선택하고, 어떤 미래를 선택하고, 어떤 만남을, 어떤 감정을, 어떤 스타일을, 어떤 놀이를, 어떤 공부를 선택할 지는 뭘 한다고 해도 뭐든지 OK! 정답을 모르겠다면 저질러보고 수습하면 됩니다. 걸어도 보고 달려도 보고 때로는 주저앉아서 울어도 봤다가 또 힘내서 걸어가면 됩니다. 헤매는 그 길이 바로 A님의 인생이고 새로운 길입니다. 사무직도 생산직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이왕 등록금 낸 것 학교 공부 1등이라도 목표로 해보세요. 교수님이고 선후배고 친구들이고 상담실이고 활용할 수 있는 건 몽땅 활용해보세요. A님이 할 수 있는 건 정말로 많습니다. 되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아직 가보지 않은 길이 얼마나 많은가요. 

A님. 과학기술의 발달로 100살까지는 살아남아야 해요. 갑자기 의사가 되겠다거나, 우주비행사가 되겠다거나, 패션모델이 되겠다거나 뭘 결심해도 시간은 충분합니다. 자신을 싫어하고 평가절하하기 전에, 자기 자신과 충분히 친해져보시기 바랍니다. 







덧글

  • 2012/11/01 16:55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2/11/02 00:44 #

    또 찾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ㅅ^ 제가 오늘 어떤 영화를 봤는데요. 언제 찾아와도 그 자리에 있는 고향 같은 존재... 라는 대사가 나오는데. 문득. 닥터엘 연애상담소가 그런 곳이 될 수 있다면 어떨까 생각이 들었어요. 힘들고 지칠 때 시간이 오래 지나서 찾아와도 변함없이 같은 모습으로 있는 곳. 저에게는 사실 돌아갈 수 있는 고향이 없거든요. 다음에 또 찾아오고 싶을 때도 닥터엘 연애상담소가 여전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다면 정말로 멋질 것 같아요. 저도 고마워요! ^ㅅ^
  • 2012/11/01 22:05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2/11/02 00:45 #

    ^ㅅ^ 맘에 든다고 콕 찍어주시니 저도 그 문장이 맘에 드네요. 새삼. 고맙습니다. ^ㅁ^
  • 꿈꾸라 2012/11/02 11:04 #

    잘 지내셨어요? 갑자기 추워져 감기는 안걸리셨나 모르겠습니다.
    요새 성수기라서 많이 바쁘게 지냈네요. 사진도 찍으러 다니고요..ㅎ
    엘님~ 이번 처방전도 딱 저에게 해당되는 거네요.
    인생의 갈림길을 좀 헤매고 있어도
    인생 기니까 내가 하고 싶은거 하면서 걸어가려고요..

    보고 싶었는데 찾아오니 반가운 선물같은 처방전에 가슴이 따뜻해지는 하루입니다.
    이제 가을은 가고 겨울이 오고 있네요.^^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 2012/11/02 20:02 #

    일년이 너무나 훌쩍 흘러가버렸어요. 계절이 바뀌는 것도 비디오테잎 2배속으로 돌린 것 마냥 정신없이 그렇네요. 우리 모두 건강합시다. ^ㅅ^
  • Jiny 2012/11/02 17:16 #

    항상 잘 보고있답니다
  • 2012/11/02 20:03 #

    덧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ㅅ^
  • 목짧은기린 2012/11/03 12:21 #

    프린트해서 코팅해서 벽에붙여놓고 가방에넣어두고 매일매일 보고싶은 조언입니당
  • 2012/11/05 15:20 #

    ^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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