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5th prescription_부모님을 잃고 친척집에서 살아오다 독립하려고 하는데,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G님 : 

큰집에서는 제가 미성년일 때 부모님이 모두 병으로 돌아가셔서, 대학까지 뒷바라지하겠다고 하고 저를 데려갔습니다. 어릴 땐 몰랐는데 청소년기에 들어서고부터는 참 힘들었어요. 큰아버지, 큰어머니 모두 감정적이고 다혈질이시죠.

부모님이 돌아가시며 생명보험금은 어른들 사이에서 왔다갔다 했습니다. 저는 보험금의 규모도 알 수 없었고 늘 눈치보며 돈을 타써야 했습니다. 큰아버지는 제가 결혼을 해야 이 집을 나갈 수 있다 생각하는 것 같지만, 저는 정말로 싫습니다. 하고 싶은 공부도 늘 돈 때문에 계획이 틀어지고, 제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저는 남은 보험금을 챙겨서 독립하고 싶지만, 항상 큰소리로 화부터 내는 큰아버지와 대화를 시작할 엄두도 낼 수 없습니다. 어른들은 언제나 저를 주눅 들게 했고 화를 냈고 눈치 보게 만들었습니다. 당당하게 얘기하고 싶어도 서럽고 속상한 기억들 때문에 눈물부터 먼저 납니다. 








(위는 요약내용입니다.)



G님, 엘입니다. 

유년을 잃어버린 어른들도 참 많습니다. 괜찮습니다. 엄마아빠가 다 있다고 꼭 행복한 건 아니니까요. 내가 무사히 어른이 되었다면, 이제부터 스스로를 더 잘 돌보겠다 다짐하면 됩니다. 가족이라는 지옥보다는 혼자라는 고독이 더 나을 지도 몰라요. 내가 삶을 함께 할 사람을 선택하면 되니까요. 누구라도, 어디에 있더라도, 내 사람을 선택할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천천히 시작해볼까요. 

어르신들의 사정은 G님이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보험금은 G님의 몫이죠. 법정대리인이 누군지 확인이 가능하다면, 이제 성인이 되었으니 G님이 모든 권리를 되찾아오셔도 됩니다. 보험회사 고객센터에 상담을 하면, 보험금의 수령은 언제인지 얼마인지 누가 수령해갔는지 전부 알 수 있습니다. G님의 모든 금융 및 재산 관련하여 정리정돈은 빠를수록 좋습니다. 

법정대리인이 필요하지 않은 성인이 되었기 때문에, G님은 전세계 어디를 가서 살아도 문제가 없습니다. 현실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계획을 세우셔야 합니다. 남은 보험금은 개인 통장으로 모두 이체하도록 하세요. 지금까지 양육에 들어간 돈은 어느 정도인지 계산을 해보세요. 피터팬의 좋은방 구하기 까페로 들어가서 어느 정도의 방이면 혼자 살 수 있을지, 시세는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보세요. 앞으로 생활비는 대략 어느 정도 필요한지, 먹는 것, 입는 것, 생필품, 세금, 통신비, 월세 등의 규모를 확인해보세요. 자취하는 친구가 있다면 물어봐도 좋고, 자취생 까페에 들어가서 자료를 찾아봐도 됩니다. 노트를 펼치고 여러가지로 현실적인 시뮬레이션을 해보세요. 혼자 살아보지 않았다고요? 누구에게나 처음은 필요하죠. 많은 아이들이 스무살만 넘으면 다들 집 떠나와 학교 다니고 알바 하고 살아갑니다. 쉽지 않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랍니다. 

만약 큰아버지와 말씀 나눌 때 무턱대고 화낼까 두렵다면, 그만큼 이쪽에서 더 준비하면 됩니다. 큰아버지의 예상 질문 리스트를 만드세요. 그리고, 대한법률구조공단에 전화해서 무료 상담 안내 받으시고(= 법정대리인이 아닌 본인의 권리 행사를 직접 하기 위한 구체적 절차부터 체크해보시고요. 저도 여러가지 문제로 종종 이용하는데, 굉장히 친절합니다. 직접 찾아가셔도 되고, 전화 상담도 해줍니다.) 법적으로 궁금한 게 있다면 뭐든지 답변을 받아서 메모해두시면 됩니다. 큰아버지가 감정적으로 나올 때 G님이 울거나 똑같이 화내거나 주눅이 들면 대화가 이어지지 않습니다.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상대의 페이스에 휘말리게 되어 있습니다. G님이 모든 답에 대한 숙지가 끝났다면, 누구와 만나도 휩쓸릴 일이 없습니다. G님은 언제 독립해도 독립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회에 나가면 자신을 이용하려는 수많은 권력들과 싸워야 하죠. 그들은 직장상사나 회사조직이기도 하고, 심지어 가족이나 연인이기도 하죠. 그저 조금 일찍 시작하는 것 뿐입니다. 나를 지키는 연습을 말이죠. 

물론, 또래 아이들의 평화로운 삶과 비교하면 우울해지기도 합니다. 저 역시 그랬답니다. 스무살에 가족과 떨어져 앞으로 살아갈 날을 생각하니 막막하더라고요. 어른이 될 때까지 내가 해온 일이라곤 공부 밖에 없었는데, 세상에는 알아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더라고요. 돈 관리부터 시작해서 각종 계약, 방범 문제, 세금 문제, 개인정보 관리, 제대로 된 물건을 사기 위해 알아야 할 것들, 명문화되어 있지 않지만 관례적인 세상의 법칙들, 법과는 무관하게 내가 손해보면서도 감수해야 할 것들, 정의롭지 않은데 나만 빠지면 바보 소리 듣는 일들, 몸에 좋은 음식과 나쁜 음식, 가정가사의 각종 스킬들, 요리, 장보기, 옷 관리, 쓰레기 관리, 청소와 위생 문제, 생필품을 싸게 구하는 일, 이웃과의 적당한 거리, 가족과 지인들에게서 내 사생활을 지키는 방법 등등... 연애니 사랑이니 문화생활이니 사치였죠. 꿈을 찾는다? 내 적성을 찾는다? 교양? 봉사정신? 예술? 자아계발? 힐링? 그럴 정신이 없었어요. 오로지 생존, 생존, 생존으로 점철된 20대를 보냈죠. 나를 이용하려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헤치면서. 다치고 구르고 벽에 부딪히고 눈물 말라가면서. 

하지만, G님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어요. G님의 20대에는 인터넷이 있기 때문이죠! 정보를 찾는 만큼, 발품 파는 만큼, 안전하게 쾌적하게 목적지까지 갈 수 있어요. 궁금한 건 뭐든지 물어보세요. 닥터엘도 좋고, 구글도 좋고, 네이버도 좋아요. 답을 찾자면 어디에든 있어요. 신뢰도는 천차만별이겠지만. 

G님. 

혼자라는 생각에 작아지지 마세요. 우울해지지 마세요. 내 기분과 감정을 다루는 연습, 고독감과 스트레스와 문제를 직면하는 연습은 생의 어느 시기에서라도 필요한 스킬입니다. 오히려 빨리 시작할수록 좋죠. 혼자이기 때문에 관계를 지향하게 되고, 그래서 G님은 더욱 현명하고 용감하게 누군가와 만나는 에너지가 있을 지도 몰라요. 불안과 흔들림과 막막함에서 도망가지 마세요. 일단은 친해지세요. 나의 부정적이고 나약한 모든 것들은, 평생 내 옆에 있는 친구들입니다. 익숙해지세요. 그리고, 그것들이 옆에 있어도 괜찮다는 건만 알면 됩니다. 내 발걸음이 성큼성큼 크지 않아도, 천천히 걸어도, 조금 돌아가도, 괜찮다는 것만 알면 됩니다. 비교비교 능력만 버리면 됩니다. 넓게 보고 다양하게 보고 다르게 보고 크게 보는 연습을 하세요. 비교비교만 버리면 열등감에 사로잡힐 일도 주눅들 일도 없습니다. 

G님에게는 희망의 노트가 절실한 것 같아요. 물론, 벌써 블로그나 일기장이나 다이어리 같은 곳에 매일매일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기록하면서 한걸음 한걸음 꾹꾹 밟아 걸어가고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내가 어디로 가야할 지 무엇을 해야할 지 모르겠다면, 변화의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현실화하기 위한 로드맵을 그리는 방식으로 바꾸면 됩니다. 현실을 파악하고, 내 자산을 정리정돈하고, 조력자나 이용가능한 서비스르나 네트워크를 준비하고, 전략을 정하고, 액션플랜을 세우고, 리스크를 상상해보고 대비해놓고, 시뮬레이션을 몇번이라도 해보고. G님이 회사를 들어가든, 학교를 들어가든, 독립을 하든, 노트가 있다는 건 덜 흔들리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랍니다. 

G님. 

이건 저만의 팁인데. 자신이 너무 작아지고 무력하게 느껴질 때는 따뜻한 욕조에서 목욕을 한 다음 일찍 잠을 청하세요. 그리고, 머리 속으로 완벽한 엄마아빠(혹은 연인 혹은 키다리아저씨 혹은 신 혹은 우주의 목소리)를 상상하고 그들과 대화를 해보세요. 그 존재는 언제나 공정하고 현명하고 따뜻하고 완벽하게 G님 편이에요. 당신을 늘 지지하고, 늘 들어주고, 늘 안아주고, 늘 위로해주죠. 그들과 행복한 대화를 마치고 천천히 잠에 빠져드세요. 그런 존재가 실제로 있든없든 상관없어요. 이러한 상상 놀이를 몇번 반복하면, 마음이 불안할 때 빨리 안정을 찾는 루트를 뇌가 기억하게 됩니다. 당신을 구원하는 건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당신 자신이죠. 효도도 셀프, 구원도 셀프, 인생은 셀프니까요. 

G님. 더 강해질 거고요, 더 현명해질 거고, 더 용기가 생길 거고, 더 웃게 될 거예요. 산타 할아버지가 다녀가실 테니, 선물 꼭 받으시기 바랍니다.        








덧글

  • 라비안로즈 2012/12/24 17:42 #

    많이 고생하셨겠습니다.. ㅠㅠ
    이제 성인이 되었으니 나의 권리를 찾아오시는것터 차근차근 인터넷과 여러 고객센터쪽을 통해 알아보세요
    그러나 인터넷은 반쪽짜리의 답변들도 많으니 너무 맹신하시지 말구요...

    힘내셔서 내년부터는 좀더 자신의 행복한 삶을 찾으시길 바랍니다 ^^
  • 2012/12/25 20:07 #

    각오하면, 차근차근 시작하면 되죠. 처음부터 휙휙 잘 되진 않겠지만, 지치지 않는 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 ranigud 2012/12/24 17:48 #

    상대방의 프레임에 빠지지 않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하더군요.
  • 2012/12/25 20:08 #

    상대의 페이스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는, 시뮬레이션도 중요한 것 같아요. 저도 중요한 프리젠테이션 있을 때는 머리 속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두어 번 시뮬레이션 해보고 들어가거든요. 그러면 거의 실수도 없고 여유도 생기죠.
  • 이비 2012/12/25 01:48 #

    정말 좋은 조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특히 구원도 셀프라는 말씀 맘에 들어요. 저도 힘들 때 다시 찾아보고 도움을 받을게요
  • 2012/12/25 20:08 #

    셀프 아니고 주변에서 다 도와주는 삶을 사는 사람들도 많지만. 저 같은 경우는 셀프 아닌 게 없더라고요. 그냥 셀프가 노멀 모드려니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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