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5th prescription_방황하다 겨우 조건 좋은 결혼을 앞두었는데, 마음이 불편합니다

Q님 : 

어린 시절 언제나 전쟁 중이던 부모님이 가정을 포기하고 떠나시고, 저는 너무 고생하며 성장했습니다. 방황했고, 나쁜 남자를 만났고, 도망치고 싶었어요. 다행히 어렵게 엄마와 연락이 닿아서 저는 조금씩 안정을 찾았죠. 

지금 만나는 남친은 전형적인 엘리트 집안에서 유복하게 자랐어요. 남친의 부모님은 절 반대하시고, 그는 저와 결혼하고 싶다고 하지만 부모님을 거역하진 못해요. 모든 걸 버리고 한국을 떠나고 싶지만, 사업 실패로 생긴 빚도 갚아야 하고 현실적인 목표도 갖고 싶어요. 하지만, 제 발목을 붙잡는 게 너무 많습니다. 

제가 남친과 결혼까지 한다 해도 제 가족사를 보여줄 자신은 없습니다.  











(위는 요약내용입니다.)

 


Q님, 엘입니다. 

연애도 결혼도 우정도 일도 내가 편안하고 안정을 느끼는 일상의 안으로 완전하게 들어와야 진짜 나의 관계가 됩니다. 나답게 살면 된단 말이죠. 그런데, 나다운 게 뭐지? 그러게 말입니다. 많은 아이들이 엄마아빠가 만들어준 '나'에서 발버둥치다가 적응도 했다가 포기도 했다가 드물게는 알을 깨고 날아가는데 성공하기도 하죠. 

Q님이 겪은 어른들의 무책임함은 세상이 앞으로 보여줄 거대한 부조리함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입니다. Q님이 극복해야 할 문제는 자신의 힘겨웠던 불운과 방황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약자들을 향한 폭력에 어떻게 맞설 것인지 자기기준을 세우는 일이죠. 

과거는 고칠 수도 없고 바꿀 수도 없고 어차피 지나간 일입니다. 그러니 그저 버리는 걸로 합시다. 가족이라도 친구라도 연인이라도 신이라도, 나를 살리지 않는다면 버리세요. 도망가세요. 생각도 마세요. Q님이 사는 것만 생각하세요. 생존해서, 삶을 찾고 생활을 찾고 일상을 쌓아올리면 됩니다. 시간과 노력과 필요하고, 고비고비 중요한 선택의 시간이 다가올 겁니다. 하지만, 근거없이 밑도끝도없이 믿으세요. Q님은 결국 편해지고 누리게 되고 산책하듯 가볍게 삶을 걸어갈 수 있어요. Q님이 그러겠다고 마음 먹기만 한다면. 

너무 추상적으로만 들릴 지도 모르겠어요. 속편한 위로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Q님이 마음의 고통을 선택하든, 평화를 선택하든, 어떻게 마음 먹어도 시간은 공평하게 흘러요. 스물이 온 것처럼 서른도 올 테고, 마흔도 올 것이고, 쉰도 오겠죠. 방황하는 청춘이라는 말이 마치 나를 위해 존재하나 싶게 들리는 시간이 지나면, 진짜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서른도, 불혹은 커녕 흔들릴 일 투성이인 마흔도 와요. 

관건은 내가 어디에서 누구와 무엇을 하든, 일단은 미소를 짓는 마음의 여유입니다. 어차피 인생은 내가 일부러 진흙탕으로 걸어가지 않는 이상은 오늘 하루도 무사히 넘기기를 도모하면서 지나갑니다. 미래를 위해서 적금을 붓고 상승혼을 노린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내가 바깥에 나가 주눅들지 않을 만큼의 옷가지와 구두, 화장품들을 구매하면서 지나가는 건 변하지 않아요.

청담동의 앨리스들은 미모만 무기인 게 아니죠. 가족과 학력과 친구라는 자산이 있죠. 나보다 낫다고 생각하면서 한탄하나요? 그럴 필요 없어요. 지금 Q님이 가진 모든 것들이 Q님의 자산이고, 그것들을 재료로 해서 Q님의 삶은 바뀔 겁니다. 조급해하지 않고 천천히 길을 걷는다면 괜찮습니다. 돌아보면 내 현실에서도 감사와 축복인 삶의 조각들은 충분히 넘치게 있어요. 

겨우 이 정도에 만족하라고 다독이는 건 아닙니다. 당장의 막막함, 바꿀 수 없는 조건, 버릴 수 없는 인연들에 한숨짓지 말라는 겁니다. 그리고, 버릴 것을 버리고, 누릴 것을 누리라는 얘기지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내 발목을 잡는 인연은 철저하게 버리고, 나를 살리는 인연을 꼭 붙드세요. 그런데 말이에요. 무엇이 나를 죽이고, 무엇이 나를 살리는 인연입니까? 

연애나 결혼이 가장 빠른 지름길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의 구원이 꼭 남자를 통해서만 해결되는 건 아닐 지도 모릅니다. Q님이 아무리 멋진 남자와 조건 좋은 결혼을 해도, 결혼 이후에도 인생은 이어지죠. Q님은 경제적인 고통만 해결되면 행복해질 수 있나요? 사랑을 받을 수만 있다면 행복해질 수 있나요? 어떤 여자들은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오손도손 잘 살아간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 사람의 인생을 그렇게 단순하게만 설명해야 한다면 얼마나 모순입니까. 

Q님의 삶 안에 어떤 요소들을 더 고려하면, 행복이 더 구체화될까요? 그 답은 Q님이 열심히 고민하지 않으면 결코 찾아지지 않습니다. 

Q님. 

그가 가진 조건만을 보면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관계를 구축할 수 없습니다. 그가 얼마나 어른인지, 그가 얼마나 주체적인지 잘 보셔야 합니다. 나와 팀웍이 잘 맞는지, 나와 의미있는 사랑을 만들 수 있는지 잘 살펴야 합니다. 말이 통하는지, 적어도 내 말을 듣기는 하는지, 할 말 못 할 말을 가리기는 하는지 보셔야 합니다. 나를 존중하는지, 사람과 사람 사이 예의를 아는지, 감정을 다스리는지, 감성이 통하는지, 충분히 고려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Q님은 그 사람이 없어도 자신을 좋아하고 사랑하고 돌보고 구원할 수 있어야 하죠. 화가 나면 싸워야 하고, 부조리한 건 고쳐야 하고, 친구가 필요하면 낯선 사람에게도 손을 내밀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과의 애착 뿐 아니라, 내가 내 삶에 좀더 단단하게 뿌리내리고 있으면 그 사람의 조건이 무엇이든 언제나 당당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Q님은 어제의 Q님과는 아주 다른 사람입니다. Q님의 환경과 가족이 Q님의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실패와 좌절과 방황은,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도 언제라도 겪습니다. 당장에 급한 것이 돈일 수도 있지만, 친구일 수도 있고, 타인의 체온일 수도 있고, 휴식일 수도 있고, 도피일 수도 있죠. 

Q님의 선택에는 옳고 그른 잣대를 대지 않아도 됩니다. 신념과 의지, 용기를 선택하면, 불안하고 흔들려도 걸어갈 수 있어요. 어제 겨우겨우 한 걸음 떼었다면, 오늘도 똑같이 한 걸음만 가요. 그렇게 가보도록 해요.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자신을 더 믿게 되고 삶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에도 겁이 덜 나고 나보다 힘든 사람들에게도 진심으로 연민할 수 있게 됩니다. 

Q님.

중심을 잘 잡을 수 있도록 주의하면서, 그와 좀더 대화를 나누어보세요. 반드시 모든 것을 공유할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못 가진 것을 부끄러워 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결혼까지 생각한다면 물질적인, 계층적인 조건과 배경 외에도 고민해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어떤 가치를 그와 좀더 맞추어보아야 할 지 생각의 방향을 바꾸세요. 그러면, 조급함과 불안에 가려 보이지 않던 진실이 열리겠지요. 

삶의 어느 때라도 납득하는 한 걸음을 옮길 수 있게, 마음을 다스리시기 바랍니다.  

 

 

 


 



덧글

  • 푸른미르 2013/01/13 14:44 #

    맞습니다. 무조건 자신을 믿는게 최고이지요.
    자신이 무슨 단점 덩어리로 느껴지더라도 무조건 자신을 믿는게 좋더라고요.

    믿음에 무슨 논리를 따지겠습니까.
    세상에 황당한 종교를 믿는 사람도 많은데 자기자신을 믿는건 약과이지요.

    제가 청각장애이고 열등감도 많지만
    그래도 자신을 믿습니까? 무조건 믿습니다! 아멘~ 그렇고 나니깐 참 의지가 됩니다. ㅎㅎ.
  • 2013/01/13 15:07 #

    그러네요. 신을 믿는다면, 그 정신으로 자신을 믿는 게 우선이겠죠. 오늘 참 춥네요. 또 작아지는 내 마음. 웅크러드는 내 몸 ㅠㅅㅠ 추운 건 참 싫어요. ㅠㅁㅠ
  • 푸른미르 2013/01/13 15:53 #

    엘님이 추운게 싫다면 여름을 좋아하시겠네요.^^

    저는 기억이 안나지만 어렸을 적에 너무 추워서 많이 고생했었습니다.
    그래도 지구 온난화 덕분인지 옛날보다 많이 따뜻해진 편입니다.

    흐음. 댓글로 대화하면서 기분이 이리 좋아진게 엘님이 처음인 것 같습니다.
    아마 제가 비장애인이었다면 실제로 만나서 서로 말이 통할 것 같다고 생각하니 아쉬운 마음이 드는군요.

    그것도 인연이겠지요. 엘님의 일상에 편안한 시간 되시길!
  • 2013/01/14 14:10 #

    우리는 모두 인연이에요! 제가 맨날 포스팅하는 것도 아니고, 포탈 사이트의 파워 블로거도 아니고, 막 흥미 위주의 글을 올리는 것도 아니고, 멋진 사진을 올리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인연이 되어서 댓글로 만나고 있다는 것도 희박한 확률이 아닐까요 ^ㅅ^ 장애가 있거나 없거나 소통의 방법은 여러가지죠. 소통의 장해가 없어도 소통이 안되는 경우도 부지기수니. 찰나라도 통한다면 기쁜 일. ^ㅁ^

    저는 어릴 때 집이 참 추워서요. 제 여동생은 동상에 걸리고. 방에서는 입감 나오고. ㅠㅅㅠ 보일러 돌릴 돈이 없어서 물을 데워서 쓰고. 참 어려웠답니다. 뭐, 그런 환경에서 살다보니 지금도 참 살림이 안 피네요. 허허허. 지금은 뜨거운 물 맘껏 쓰니 조금은 좋아졌지만. ^ㅅ^ 하도 어릴 때 고생고생 하고 살아서, 지금도 뜨거운 물 맘껏 못 쓰고 사시는 분들 보면 맘이 참 안 좋아요. 그 고생을 아니까요.

    푸른미르님도 오늘도 화이팅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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