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9th prescription_이별 선언 앞에서 차라리 담담한 건 뭘까요.

A님 : 

그녀는 구남친에게서 우울함과 상실감을 상쇄할 수 있었지만, 서로 맞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녀가 하나의 연애를 정리하는 동안 저는 기다렸고, 충분히 시간을 가진 후 우리는 연인이 되었죠. 

우리는 연애하며 친구처럼 가족처럼 사랑했고 행복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는 두근거림이 사라졌다며 헤어지자 하더라고요. 그녀는 모든 생각을 다 받아들인 탓인지, 저는 분노도 서운함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차라리 너무나 무덤덤하더라고요. 이 감정이 무엇인지 정말로 궁금합니다. 제가 사랑하긴 한 걸까요. 











(위는 요약내용입니다.)



A님, 엘입니다. 

사랑은 일종의 신념이나 종교 같은 거죠. 호르몬의 장난이기도 하고요. 감기 같은 열병이기도 하고, 성욕이기도 하고, 가족애나 우정, 인간애이기도 합니다. 흥미나 호기심, 감사와 희생, 봉사와 희망, 게임이나 미션이기도 합니다. 목표이기도 하고 수단이기도 하죠. 

애착관계는 라이프사이클이 있습니다. 유지보수하지 않으면 기승전결로 끝납니다. 기대와 호기심과 본능적인 끌림으로 시작해서, 익숙해지고 편해지고 당연해지고 종국에는 지루해지고 식상해지고 지긋지긋해지죠. 

쉬운 예로 엄마와 아기와의 관계를 생각해보자고요. 아기가 처음 태어났을 때 맨날 우쭈쭈쭈 죽네사네 하던 엄마들이 20년 뒤 서로 무슨 생각하는지 잘 모르는 남처럼 동거하기도 합니다. 또는, 아기가 어른이 되어도 사랑과 애정과 관심을 주고 받으며 처음과 같은 애착관계의 질을 유지하기도 하죠. 

관계는 오래 된다고 낡아가는 게 아닙니다. 매일매일 서로의 존재가 감사한 인연임을 알고, 서로가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는 옆을 지켜주고, 힘들 때 어려울 때 친구가 되어주고, 기쁠 때 행복할 때 누구보다 먼저 나누고, 당연하고 익숙한 것들을 새롭게 보려 노력하고, 공동의 목표를 발견해내고, 함께 나누는 행복의 코드를 더욱 두텁게 할 수 있다면, 관계는 내가 그런 것처럼 성장하고 발전하고 새로워지죠. 

막연히 연애하니까, 사랑하니까, 가족이니까 관계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내버려두면, 관계는 점점 당연한 노화의 사이클을 밟아갑니다. 시간은 점점 빨리 흐르고 의미가 없어지고 새로운 자극을 기대할 수 없게 되죠. 

나이가 들수록 재미없다 의미없다 빨리 죽어야지, 말씀하시는 어르신들 본 적 있나요? 그 분들에게 미래는 갈수록 암울한 겁니다. 하지만, 세월이 착실히 흐르고 있기 때문에 더 깊어지고 풍부해지고 아름다워지는 것이 삶이잖아요. 연애라는 애착관계에서 막연히 기다리기만 하면, 끝은 올 수 밖에 없어요. 

A님. 

당신이 이별 선언 앞에 차라리 담담하였다면. 정말로 사랑하였기 때문에 그러하였겠죠. 그녀가 왜 그런 선택을 하는지 이해하기 때문에 그러하였겠죠. 애착관계에 매몰되지 않고, 애착관계를 온전히 누렸기 때문에 그러하였겠죠. 살아가며 사랑에 대해서 연애에 대해서 결혼에 대해서 깊이 고민해보았기 때문에 그러하였겠죠. 서로가 다르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그녀를 존중하고 아끼기 때문에 그러하였겠죠. 

단지 이별이 왔을 뿐, 나의 사랑이 사라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괜찮을 수 있었겠죠. 내가 할 수 있는 한 관계를 책임지고 누려왔다면, 상대를 원망하고 탓할 일도 없겠죠. 그녀의 빈자리는 천천히 자각되겠죠. 나중에는 그녀가 떠난 일에 대한 다양한 감정들이 찾아왔다 사라질 거예요. 매번 다른 의미들이 생겨나겠죠. 연애의 시작과 끝에는 분명히 이별과 이별 후도 포함되니까요. A님은 자신의 연애를, 삶의 일부로서 받아들이고 이별과 이별 후의 시간까지 충실하게 보내실 겁니다. 

A님. 

좋은 연애를 하셨어요. 그리고, 또 새로운 인연을 만나시고 사랑을 하게 되실 거예요. 그녀와도 아마 친구로 남지 않을까요. 왠지 그런 생각이 드네요. 그녀도 좀더 나이가 들면 '두근대는 심장'에만 의미를 두는 건 바보 같은 일이라 알게 되겠죠. 두 사람에게 시간이 더 지나가길 기다려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덧글

  • ranigud 2013/08/15 21:44 #

    줄만큼 주고 받을만큼 받았기 때문에 무덤덤한 거 아닐까요. 꼭 이별한다고 해서 울고불고 며칠밤새고 힘들고 하진 않아요.
    오히려 궁합이 잘 맞는 사람끼리 헤어지면 쿨하게 헤어진다고 하더군요... 두분 다 서로에게 충실했기 때문에 미련이 없는 걸 거에요.
  • 2013/08/16 13:10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3/08/16 15:11 #

    연애관계에서는 암묵적으로 책임져야 할 것들이 많지만, 이별 후에 이런 부담감이 없어서 편해지는 관계들도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답변이야 드리지요. 처방전 드리는데 백년 걸려서 그렇지... ㅠㅅㅠ 여튼 차근차근 잘 헤쳐나가시는 것 같은데요? ^ㅅ^ 다행이에요.
  • 2013/09/04 08:38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3/09/04 11:38 #

    두 분 연인이기 이전에 대화가 통하는 사이였다는 사실은 너무나 큰 축복이고 행운인 것 같네요. 비공개님처럼 천천하고 신중하고 깊게 생각할 수 있는 남자들 흔치 않죠. 시간이 지나면 좀더 명확해지겠지만, 두 사람이 인연이라면 이대로 끊어지진 않을 겁니다. 연인이기 이전에 인간적으로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인가, 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비공개님 케이스로 깨닫게 되네요.
  • 2013/09/04 13:18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3/09/06 14:22 #

    먼저 대화를 요청하는 사람이야말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지요. 의지도 있고 방법을 아니 갈등 앞에서 도망가지 않을 수 있지요. 비공개님 같은 남자, 진짜 드물어요. 정확히 말하면 제가 만난 구남친들 중에서는 없었습니다. ㅠㅅㅠ 도움이 되었다고 하니 다행. 제가 별로 한 일 없고 스스로 척척 다 해결하신 것 같지만... ^ㅅ^
  • 2013/09/25 12:56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3/09/26 02:07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3/09/26 09:03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3/09/26 23:51 #

    넹? 제가 막막 비공개님의 성장에 보탬도 되고 그랬나요. 아하하하하. 제가 언제 그런 일까지 했다죠. 신기하네요. 닥터엘 연애상담소가 타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차곡차곡 쌓이는 현장에 비공개님도 계셨네요. 음. 보람차기도 합니다.

    좋은 인연을 기다리며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일. 잊고 있었던 일인데, 저도 노력해야겠습니다. 지금은 저질 체력 충전하는 일부터 해야 할 듯. 건강이 많이 안 좋아졌어요. ㅠㅅㅠ 우리 모두 건강합시다! 홧팅!
  • 2013/09/27 08:55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3/09/30 17:13 #

    으엥. 그런 드라마가 또!!!!!!! 대체 이 이야기의 끝은 어디인가... ^ㅅ^ 만약 다시 시작한다 해도 비공개님이 주도권 잡을 수 있는 안정감 있는 관계 되시기를 빌어요. 그녀의 지난 스토리들을 돌이켜보면 확실히 연애관계를 드라마로 만드는 습관 아닌 습관은 있습니다. 그녀가 자기 중심을 잘 잡을 수 있으면 좋겠네요 아니면 또 비공개님 힘들게 만들지도 모르니까.
  • 2013/08/16 14:12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3/08/16 15:12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3/08/16 15:51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3/08/16 17:03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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