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님 :
양가 인사드릴 날짜까지 정해놓은 어느날이었습니다. 우리를 주선해주신 어르신으로부터 전화가 왔고, 그동안 제가 이런저런 잘못을 해서 상대가 화가 많이 났다고 전하더라고요. 저는 정말 황당했습니다. 선으로 만나도 제대로 연애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봐요.
이후로 그는 연락도 안 받고 연락이 없고요.
한참 뒤에 전해들은 바로는 제가 고분고분한 스타일이 아니래요. 자기 말을 잘 안 들어주어서 화가 날 때가 많았다는 겁니다. 제가 조선시대를 사는 건지 21세기를 사는 건지 모르겠지만, 살다살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어쩔 바를 모르겠네요.
(위는 요약내용입니다.)
K님, 엘입니다.
아직도 어르신들이 허락하는 결혼을 해야 하고, 말 잘 듣고 조신한 며느리, 애교 많고 내조 잘 하는 아내, 양육의 유일한 주체로 모성애 넘치는 엄마, 가정가사를 완벽하게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맞벌이를 해서 생활비를 보태는 능력까지 갖춘, 그렇지만 남편의 연봉보다는 적게 벌어 남편의 기를 죽이지 않는 여성을 이상적 현모양처로 꼽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머나, 여기까지 쓰고 보니 손발이 오글오글 하는데요.
결혼하며 여성이 멀티플레이어가 되길 원하는 건, 여성을 다른 가족구성원을 서포트하는 보조적 존재로 설정해온 역사가 길기 때문이죠. 여성인권을 말하기 시작하면 그동안 여성이 담당했던 모든 역할을 다른 가족구성원들이 나누어야 하기 때문에, 각자의 이기적인 이유로 다들 이렇게 산다, 이것이 바로 여자의 운명이다, 결혼은 원래 그렇다, 너의 조상들이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계속 너도 그래야 한다, 라고 세뇌시키려는 것뿐이랍니다.
고분고분한 스타일.
하, 좋네요. 고분고분하게, 시킨 일을 군말없이 들어주는 조신한 여성. 참 사용하기 편리하겠죠. 또 무음모드라 조용하겠죠. 필요할 때는 애교나 격려나 칭찬이나 친절행동이나 다정행동 모드로 전환해서 즐거움도 주겠죠. 의견이나 주장은 나만 해도 충분하니 불필요한 발언은 듣고 싶지 않겠죠.
분명히 내 입맛에 맞는 선상대를 골랐는데, 놀랍게도 K님이 의견도 있고 주장도 있고 감정표현도 하고 연봉도 상대보다 더 높은데 얼마나 당황하였겠어요. 놀랐겠죠. 주선한 어르신이 원망스러웠겠죠. 그런데, 막상 K님 앞에서 이런저런 건 싫다, 안 맞다, 얘기하면 K님이 또다른 의견을 제시할 것 같아 무서웠겠죠. 그래서, 뒤에서 힘들다 화난다 못 참겠다 일러바쳤겠죠.
그러니까, 축하드립니다.
가부장적 결혼을 피하신 것 정말 축하드리고요. 선으로 만나도 상대가 나를 한 인격체로서 존중해주고, 나와 연애하는 이유, 결혼하는 이유를 맞출 수 있고, 서로가 각자 다른 인격체로서 다른 세계관을 가질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면 괜찮고요. 연애하는 중간중간 얼마든지 진행성 발언해도 괜찮고요. 연애하면서 상대가, 여자는 이래야 해, 우리 집안에 들어온 이상은 저래야 해, 결혼하면 넌 이걸 바꿔야 해, 저걸 조심해야 해, 라고 말한다면 절대로 만나지 마세요.
가부장제가 장점이 되는 경우도 분명히 있어요. 가장이 모든 가족 구성원을 책임지고 보호하고, 모든 가족이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며 행복하다면 무슨 문제겠어요. 난 현모양처로 다른 가족들의 보조적 존재로 사는 게 너무나 행복해, 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그 사람의 소명이고 행복이에요.
하지만, 우리가 공교롭게도 21세기를 살아가고 있고 귀한 집 딸로 자란데다 대부분이 쓸데없이 많이 배우고 똑똑하여서, 의견과 주장과 생각을 갖고 있단 말이죠. 아뿔싸, 인권이라는 개념도 배워버렸단 말이죠. 책과 인터넷과 교통 및 통신수단의 발달로 인권수준이 다른 사회는 어떻게 사는지도 알고 있단 말이죠. 다양한 결혼 시스템이 있고, 가족관계가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죠. 우리한테 고등교육을 의무적으로 받게 한 다음에, 가부장적 결혼을 고분고분 선택하라니 말이 되나요.
K님.
고분고분 살지 말아요. 말 통하는 사람과 만나요. 아닌 건 아니라고 말했을 때, 나를 존중하는 사람과 연애해요. 나를 역할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과 사랑해요. K님은 쓰임새를 위해 태어나지 않았잖아요.
다시 한번 이별을 축하드리며, 앞으로도 자유와 광명을 만끽하시길 빌겠습니다.
덧글
santalinus 2016/04/23 00:59 #
엘 2016/04/27 17:33 #
santalinus 2016/04/27 21:24 #
엘 2016/04/28 00:4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