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5th prescription_제 상처를 전부 털어놓아야 할까요

X님 : 

저는 오래 전 피임에 무지한 탓에 낙태수술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죄책감과 자괴감에 시달리다, 가까스로 그 기억을 잊었는데, 결혼을 앞두고 나니 제 과거가 미안합니다. 그 일만 생각하면, 사고가 나서 제가 죽으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남친에게 이 일을 이야기해야 할까요. 

참고로, 남친은 자기 집안의 과거사를 전부 다 털어놓았습니다.  























(위는 요약내용입니다.)





X님, 엘입니다. 

여성이 성폭력의 피해경험 하나도 없이 살아남기 힘든 사회입니다. 여성인권이 바닥을 치는 나라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으셨다면 당신은 이미 어마어마한 일을 해낸 사람입니다. X님이 인생을 살며 어떤 경험을 했든, 그것으로 X님의 가치를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X님 자신뿐입니다. 

어떤 사건사고의 피해자였다고 해서, 자신의 몸에서 일어난 일에 어떤 선택을 했다고 해도, X님이 지금 살아남아 자신과 삶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여성혐오가 작동하는 사회에서 여성의 몸은 언제나 관건이 됩니다. 세상의 모든 권력이 여성의 몸에 등급을 매기고, 코르셋을 입히고, 임신과 출산을 강요합니다. X님이 아닌 바깥의 권력이 정한, 바람직한 임신, 바람직한 섹스, 바람직한 출산만이 여성을 명예롭게 만들죠. 개인의 선택이어야 할 임신과 섹스와 출산이, 다양한 맥락과 이유와 의미로 이루어져야 할 생의 여러 선택들이, 왜 유독 여성에게만 다른 잣대로 강요되고 당연시 되어야 합니까. 

개인의 성별이 무엇이냐에 따라, 다른 윤리, 다른 의무, 다른 죄책감과 수치심을 학습시키는 사회는, 여성을 재생산의 하찮은 하위요소로 취급하겠다는, 여성혐오 사회입니다. 

그러므로, X님. 당신이 잘못한 건 아무 것도 없어요. 왜 고통받고 왜 미안해 하고 왜 부끄러워합니까. 

어떤 성경험이든, 어떤 성폭력이든, 어떤 임신과 출산과 낙태수술이든, X님은 어떤 결정이든, 어떤 선택이든, 어떤 의미이든, 스스로 정하시면 됩니다. 정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X님의 몸이고, X님의 선택이고, X님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태어날 미래의 생명보다 존엄한 것이 X님이라는 현재의 존재입니다. 여성은 임신과 출산을 위한 캐리어나 컨테이너가 아닙니다. 여성은 몸만으로 가치가 결정되지 않습니다.

X님. 

앞으로 누구와 만나 어떤 연애를 하고, 어떤 섹스를 하고, 어떤 출산을 하든, 이 모두를 하지 않든, X님은 자신 삶에서 무엇이든 추구해도 되고, 편안해도 되고, 어떤 인연을 만나셔도 됩니다. 즐겁게 행복하게 사셔도 되고, 모험을 하셔도 되고, 도전을 하셔도 되고, 춤을 추셔도 됩니다. 타인을 해치지 않는 한 최대한 자유로워지세요. 그리고, X님 곁에 X님과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이 있다면, 다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람 되세요. 

X님. 

오래 전에 낙태수술을 하고 제대로 회복기간을 가졌다면, 앞으로의 임신출산에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미혼이라도 산부인과 정기검진은 가셔야 하죠. 임신출산을 원한다면, 얼마든지 자신의 몸에 대한 건강을 챙기세요. 

그리고. 

남친이든 가족이든 자신이 겪은 힘들었던 일에 대해서는 절대로 이야기하지 마세요. 대부분의 지인과 가족과 연인이, 1. 무반응 2. 나를 훼손된 몸으로 취급 3. 나를 탓하며 2차 가해 하기 일쑤입니다. 가장 첫 문장에 말씀드렸다시피, 대부분의 여성들은 일생동안 크고작은 온갖 성희롱 상황과 강간, 살해를 당하거나 가까스로 피하면서 생존합니다. 남친분의 인권감수성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되도록 X님을 부정적으로 판단할 만한 정보는 주지 않는 편이 편리합니다.  

남친도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하셨는데 설마 각색이나 편집이 조금도 없었을까요. 상대가 부담스러울 수도 있는 모든 과거사를 다 털어놓는다는 것도 어떻게 보면 배려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본인도 극복하지 못한 온갖 사건사고를 전시하며 나를 이해하고 감당해라, 라는 메세지가 아니었길 진심으로 바라고요. 부부라고 해서 모든 것을 오픈하고 공유할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두 사람이 얼마나 서로를 신뢰하는지에 따라서, 조금씩 오픈하고 공유하는 쪽이 존중과 예의의 태도에 가깝겠죠. 

X님. 

혼자만의 고민이 결코 아닙니다. 만약 도움이 필요하다면, 여성의 전화나 성폭력상담소, 가까운 정신보건센터를 찾거나, 비용을 부담하실 수 있으시면 정기적인 상담도 받아보세요. 분명 마음도 편해지고 앞으로의 할 일도 명확하게 보이기 시작할 거예요. 전문가들이 왜 있겠습니까. 그들은 철저하게 비밀보장의 의무를 지키며, X님을 2차 가해 하지 않고, X님이 자신을 더 잘 돌볼 수 있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X님. 

없었던 일로 하기로 결정하였다면, 정말로 없었던 일입니다.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지금은 그보다 결혼에 대해서 X님이 얼마나 이해하고 준비되어 있는지, 반려자가 될 상대와 공동의 목표와 가치를 제대로 추구할 수 있는지, 그것이 더욱 관건이 아닐까요. 

부디 마음의 평화 찾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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