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클리셰 스터디 35 : 고백하고 나서


 

: 본 칼럼에서는 다양한 텍스트들을 통해, 픽션이 보여주는 연애의 법칙들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현실의 연애가 얼마나 다른지 차근차근 짚어봅니다.


: 상처와 고통을 겪기 전에 미리 알았다면 좋았을 것들을, 하나라도 얻어간다면 좋겠습니다.


: 주의! 드라마 자체를 비판하기 위한 글은 아닙니다. 때문에 드라마에 대한 정보는 없습니다.

 

***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TEXT: [W], [도깨비], [, 오해영], [미안하다 사랑한다], [구르미 그린 달빛], [푸른 바다의 전설] 외 다수

 

로맨스 드라마의 첫 시작부터 남녀 주인공이 사이좋고 다정한 경우는 없습니다. 서로를 오해하고 미워하고 심지어 죽네사네 싸우고, 가해/피해 사건에 얽히거나 돈으로 관계를 사고 팝니다. 둘 사이의 갈등이 극으로 치닫게 될 때쯤, 더 이상 새로운 전개가 애매할 때쯤, 여자주인공의 사정이 한없이 절망스러울 때쯤. 우리는 드디어 예감하죠. 여기까지 고생고생 굴러왔으면 로맨스 보상이 올 때도 왔구나 싶어요.

 

마침내 그 남자가 선언합니다.

 

사랑해.”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우리는 BGM이 빵 터지는 연출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조명이 샤르르 녹아들고, 주제가가 클라이맥스로 치닫고, 클로즈업 되는 두 사람의 표정에서 우리는 사랑을 읽죠. 한 사람이 사랑을 선언하면, 듣는 사람은 그 말을 듣게 될 줄 꿈에도 몰랐다는 듯 깜짝 놀라고, 그 다음은 모든 걸 이해했다는 듯 다짜고짜 키스씬으로넘어갑니다.

 

로맨스 드라마가 1. 사랑한다는 선언과 2. 주제가와 3. 키스씬을 한꺼번에 제시하는 이유는, 이 모든 요소가 하나의 [고백 세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익히 알아서 당연하게 기대하는 로맨스 장르의 클리셰는 늘 같은 메시지를 전합니다. [고백 세트]의 전제와함의는 아래와 같아요.  

 

1. 사랑한다는 말은 모든 갈등을 상쇄할 만큼 의미심장하며, 그 말의 의미를 따지거나 의심하면 안 된다.

 

2. 사랑한다는 선언은 연애관계를 시작하자는 제안인 동시에 이대로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같이 살 거라는 예언이다.

 

3. 사랑한다는 선언은 우리가 이제부터 성적인 스킨십을 시작해도 된다는 제안이며, 키스를 피하지 않는다면 이후 벌어지는 모든 스킨십에 대한 합의와 같다.

 

요약하자면, [사랑해 => 진실되고 영원한 사랑의 약속 => 연애 시작 => 키스 => 섹스]로 두루뭉술 넘어가는 씬이 바로 [고백 세트]란 말이죠.

 

정말일까요. 사랑한다는 선언만으로 모든 것이 한꺼번에 연결되고 합의되고 설명될까요. 그럴 리가 있습니까. 현실의 연애는 어떤지 이제부터 알아봅시다.

 

 

[클리셰 55 : 고백하고 나서]

 

두 주인공 중 누가 사랑을 외치든 상관없습니다. 누군가의 입에서 진심을 토해내는 순간이 오면, 고백의 대상이 된 사람은 모든 동작을 일시정지하고 진지해야 하죠. 그래야, 0.5초 뒤에 주제가가 빠바방 터지기 때문입니다.

 

드라마 [W]는 이 장면을 한번 비틀었고, 여자주인공은 사랑한다는 선언과 다짜고짜 키스를, 혹은 뺨 한번 때리고 다짜고짜 키스를 하면서, [고백 세트]가 얼마나 형식적 클리셰인지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두 사람의 진짜 고백장면에서는 키스가 어김없이 따라왔고, 우리는 그 지점에서 로맨틱한 감상을 만끽해야 했죠.

 

그런데, 드라마의 선남선녀가 아니라 그동안 제대로 된 소통도 없이 갈등만 반복해왔던 현실의 두 사람이었다면, 사랑한다는 선언이 과연 로맨틱할까요.

                                                                         

 

[실제 상황]

 

고백은 사귀자는 제안이 아닙니다. 어떤 진심을 담더라도 고백은 그저 감정이나 생각, 의견에 대한 자기표현일 뿐입니다. 좋아한다말한들, 사랑한다 말한들, 두 사람이 그동안 갈등을 겪어왔다면 단순히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없어서 그랬던 걸까요. 아닙니다.

 

두 사람은 감정을 솔직히 표현할 만큼, 친밀하지도 신뢰하지도 않았단 말이고,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며 고통 받아온 세월만큼 불통하는 사이였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사이, 그래서 편안해질 수 없는 관계, 문제가 생겨도 그것을 해결할 공통의 코드가 없는 사람들끼리, 감정이 아무리 깊은들 어쩌겠습니까.

 

고백을 한다 해서, 그동안 가까워질 수 없었던, 통하지 않았던 사이가 갑자기 통할까요. 이해가 될까요. 이심전심으로 포용할 수 있을까요. 문제가 무엇인지 알고, 제대로 해결할 수 있을까요.

 

고백은 그저 자신의 감정을 상대에게 전한다는 데 의의가 있습니다. 고백을 받은 사람은, 여러가지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감정 고백은 연애관계를 합의하자는 제안이 아닙니다.

 

다시 한번 용기를 내세요. 사귀자라고 제대로 말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프로포즈죠. 비로소 상대가 YES , NO 냐 선택할 수 있습니다.

 

만약 YES 라는 대답을 들었다 해도 끝은 아닙니다.

 

마음을 전했고, 이제부터 사귀기로 합의도 했는데, 두 사람은 여전히 친하지도 않고, 갈등도 문젯거리들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사귀기로 했는데, 그게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라는 점입니다.

 

매일 연락할 건가요. 사람들에게 사귄다고 공표할 건가요. 각자의 사생활은 어디부터 어디까지로 할 건가요. 얼마나 자주 만나죠. 이미 충분히 겪은 서로 간의 갈등과 문제들은 어떻게 해결할 건가요. 성적으로 서로 친밀해질 건가요. 연애하며 무엇을 즐길 건가요. 어떤 시간을 공유할 건가요. 혹시 비혼주의자인가요, 아니면 결혼주의자인가요. 연애하며 무엇을 나누고 싶은가요. 함께 무엇을 추구할 건가요. 이 연애를 짧게 예상하나요, 아니면 길게 기대하나요. 연애하다 헤어지는 기준은 무엇인가요. 우리가 친구가 아니라 굳이 연애여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당신의 성가치관이나 성윤리관은 어떤가요. 성매매 경험이 있나요. 성차별주의자인가요. 서로에게 기대하는 약속이 있나요. 지켜주었으면 하는 원칙이 있나요.

 

가장 자연스럽고 안전한 수준의 합의는, 친구부터 시작해요, 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데이트를 하며 서로의 가치관을 하나하나 체크하지 않으면, 서로가 어떤 사람일 지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죠. 상대가 나에게 고백하였다고, 나에게 안전한 사람일 거라 단언할 수 있나요. 없잖아요.

 

드라마는 극적인 고백씬에서, 실제로는 가장 중요한 합의나 가치관 대화는 쏙 빼놓고, 바로 키스씬으로 연결합니다. 충분히 친밀하지 않기 때문에 어색하고 불편하게, 특히나 여성은 인형이나 통나무처럼 뻣뻣하게 얼어붙어서 첫키스를 감당합니다. 즐거운가요. 편안한가요. 신뢰하나요. 무엇보다 그 키스를 원해서 하고 있나요. 내 마음 나도 잘 모르겠나요. 그렇다면, 거절하셔야 해요.

 

감각적인 즐거움을 나누는 건, 안전과 신뢰를 확인한 후 해도 충분합니다.

 

혹시나 키스를 피하거나 거절하면 상대가 민망해 하거나 화를 내거나 좌절감을 느끼거나 내가 화가 나거나 자신을 싫어한다 오해할까 봐 걱정되나요. 걱정을 하는 지점에서 이미 당신은 키스를 할 자격이 없습니다. 내 키스를 내가 편하게 결정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이미 젠더권력의 희생자라는 뜻이죠. 당신의 모든 거절이 상대에게 편안하게 전달되고, 그로 인한 관계의 불이익이 없다고 확신할 때 키스하세요. 상대는 절대로 당신의 무엇도 책임지지 않으니까요.

 

드라마가 정말로 보여주어야 하는 씬은, 고백 이후 두 사람이 대화하는 장면입니다. 중요한 질문들을 주고받고 서로의 가치관을 확인하는 소통을 보여주는 드라마가 있었나요. 21세기 버전으로 업그레이드된 젠더감수성과 비폭력을 증명하는 남자주인공이 등장하는 로맨스 드라마가 있었나요. 키스에 대해 합의하는 드라마는요? 섹스 전에 합의하는 드라마는요? 남자주인공이 콘돔을 사용하는 드라마는요?

 

드라마는 남자주인공의 부족한 인성과 소통능력을 오직 미모로만 설명하려고 합니다.언제까지 이럴 건가요.

 

 

[대안 행동]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친절하고 다정하게, 이해하고 배려하며, 아낌없이 표현하세요. 고백을 해서 긍정적인 응답을 받을 자신이 없다면,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신뢰를 줄 때까지 친해지셔야 합니다. 적어도 친구는 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서로의 공통관심사를 찾고 만날 때마다 즐거운 활동을 제안해야 하죠.

 

데이트하며 상대의 장점들을 찾아내서 칭찬하고, 좋은 것을 나누고, 자신이 얼마나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인지, 어떤 연애를 할수 있는 사람인지, 가치관에 대한 대화도 많이 하세요. 자신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상대에게도 많은 질문들을 하세요. 그래야 친해지죠.

 

충분히 친해지고 서로가 편안하고 감정이 자연스럽게 흐를 수 있을 때, 그때 고백하면 어색하지도 두렵지도 않습니다. 가치관에 대한 대화를 해 왔다면, 연애에 대한 합의도 수월하죠. 이미 많은 걸 알고 있으니까요. 단순히 첫인상만으로, 불타는 소유욕으로, 호기심이나 정복욕으로 고백하지 마세요. 만약 거절 당하면 나는 상대를 미워하고 싫어하고 욕할 것 같다면, 해서는 안 될 고백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고백을 받는 상황이라면, 잘 모르겠으면 거절하세요. 아닌 건 아닌 겁니다. 아닌 걸 아닐 지도 몰라 자신을 속이면, 그 어렵다는 사서 고생을 충동구매 하는 선택입니다.

 

 

세 줄 요약해 드리자면.

 

1. 고백은 고백일 뿐, 관계의 시작도, 의미도, 성적인 행동도 각각 합의해야 합니다.  

 

2. 고백을 하고 난 다음에 정말 필요한 건 키스가 아니라 대화입니다. 가치관 대화, 관계에 대한 합의,안전과 신뢰의 확인를 절대로 잊지 마세요.

 

3. 내 마음 나도 잘 모르겠으면 아닌 거니까, 이유불문, 맥락불문, 거절하세요.

 

 

오늘은 여기까지.

다음 이 시간에 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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