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1st prescription_언제까지 기다리면 될까요


D님 : 

만난 지 얼마 안돼 태어나서 처음으로 스킨십을 해보았고 섹스도 했습니다. 그런데, 하룻밤을 보내고 나서 연락이 안 되더라구요. 저는 절망해서 울고불고 하다가 모든 걸 포기하고 있었는데, 한참이 지나 힘들고 절박한 상황이라 그랬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변명이 구구절절 길었지만 전 다 괜찮다 알겠다 했는데, 절대로 저를 만나주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마음 주고 몸 주고 하게 만들지 말든가 아예 연락을 독하게 받지를 말지. 왜 연락을 받아주는 걸까요. 얼굴은 볼 수 없는데, 힘들다는 얘기를 듣고 또 듣고 하다 보니 이제는 제가 아주 상담역이네요. 전 이번에만 좋게 좋게 넘어가면 얼굴 보겠지 싶어서 듣고, 이 사람은 자기 하소연만 몇 시간을 하고 나서 결론은 또 못 보겠다 하고. 

제가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까요. 제가 뭘 잘못한 걸까요. 앞으로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요.


















(위는 요약내용입니다.)







D님, 엘입니다.

왜 매달리고 계세요. 이 사람이 나를 영영 만날 생각이 없고, 필요한 부분만 이용한다는 걸 이미 알고 계시잖아요. 그 사람은 D님이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인 걸 알고 있고, 절대로 함부로 자신을 내치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그는 여지와 여운을 남기면서, D님이 자신에게 감정의 배설구 노릇을 해줄 거라 기대하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해요. 여자가 미련이 있다면, 남자가 무리한 요구를 해도 얼마든지 들어줄 거라 생각해요. 연애도 성경험도 없는 여성을 만나, 마음을 빼앗고 첫경험을 정복하기 위해 어떤 사탕발림도 마다하지 않죠. 약간의 성실과 선물과 사랑한다는 말로 정신을 쏙 빼놓으면, 그 뒤는 그 때 그 때 애드립으로 책임질 위기를 넘길 수 있다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우리의 어머니들, 언니들은 그런 식으로 관계로부터 오는 불이익을 감수하며 살았어요. 여자들이 인내와 희생으로 진정한 사랑을 얻고야 마는 서사들을 보며 자랐기 때문이죠. 남자들은 여자들 정복하기만 하면, 돌봄노동과 정서지원을 무한하게 얻어갈 수 있다고 배워왔어요. 남자들의 세계란, 여자를 한 인간으로 존중하는 방법보다 지배하는 방법을 전수하며 유지되니까요. 

그러므로, 로맨스를 핑계 대며 나를 정서적 늪에 빠뜨리는 사람은, 내가 가장 먼저 피해야 할 대상이에요. 적이에요. 파괴자예요. 울며 말한다 해도 가해자예요. 친구도 될 수 없는 사람이에요. 투명인간이에요. 다른 차원의 사람이에요. 자존감 도둑이에요. 

동화 속의 로맨스가 아니라 현실의 로맨스는, D님이 납득할 수 있는 일상에서만 안전하게 꽃필 수 있어요. 그리고, 로맨스 따위 없어도 인생은 즐겁고 희망차고 아름다워요. D님이 그런 시간을 만들기만 한다면 말이죠!  

관계는 사람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하는 양날의 검이에요. 지금 나에게 고통을 주는 관계가, 처음과 같은 즐거움을 줄 가능성은 한없이 희박해요. 고통이 구원으로 보상받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기적이라고 불러요. 현실적인 선택과 책임을 피하기 위해, 문제해결의 시점을 한없이 뒤로 미루는 일은 결국 나를 말라죽게 만들어요. 

D님. 

나에게 찬사를 보내며 사랑을 속삭이던 목소리. 늦은 밤에도 한걸음에 달려와 나를 보듬던 가슴. 천지 간에 아무도 없는 내가 유일하게 믿었던 사람. 태어나서 처음으로 타인과 체온을 나누는 용기를 낼 수 있게 만든 마법 같은 순간들. 

이런 기억들에 아련하게 씌워진 필터를 빼고 다시 생각해보세요.

영혼없이 눈물을 흘리고, 눈 하나 깜짝 않고 거짓말을 하며, 별 생각없이 섹스를 하는 남자들은 널리고 널렸어요. 그들은 언제 어떻게 상대를 달래며 어떤 말로 안심시켜야 하는지도 이미 다 알고 있죠.  

D님. 

대부분의 로맨스 경험은 착각이고 사건사고이며 진실이 숨겨진 게임이에요. 내가 기대하는 로맨스를 서툴게 재현하다 실패하는 역할놀이죠. 나만의 실수나 잘못이 결코 아니에요. 우리는 누구나 같은 방식으로 속고 속이는 일을 몇 번이나 되풀이한 뒤에야, 비로소 진짜 관계를 획득할 수 있게 되니까요. 

안전사고가 일어나면 올바른 대처를 하면 그만이에요. D님에게 필요한 건, 기다림과 이해가 아니라 현실감각과 휴식이죠. 

그와 관련된 모든 연락처를 차단하세요. 평화와 자유가 찾아올 거예요. 앞으로는 꽃길만 걸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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